사람에게 인격이 있는 것처럼 책에도 책격이 있습니다.

책의 표정은 참 다양하지요.

저만치에서 활짝 웃으며 손짓하는 책도 있고 은근한 미소로 마음을 사로잡는 책도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세요.

부드러운 손길이 닿을 때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면 당신은 벌써 그의 연인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이 맑은 건 연인의 향기를 맡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은 내용뿐만 아니라 겉모습까지 살갑지요.

똑같은 물도 담는 그릇에 따라 자태가 달라지잖아요.

속깊은 마음이나 단정한 맵시가 모두 소중하듯 책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혀주는 것 또한 품격을 높이는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종이책이 곧 없어질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뉴미디어로는 도저히 만들수 없는 "책맛"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능한 북디자이너는 훌륭한 필자,기발한 기획자와 함께 베스트셀러의 3대 기둥으로 불립니다.

북디자인은 책의 겉모양인 장정뿐만 아니라 속표지 목차 글자체 여백 사진 인쇄방식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지요.

타이포그래피와 편집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등 세분화된 장르를 집대성한 매체가 곧 책이니까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북디자인이 예술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예일대 미술학부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은 출판미술 전공자라고 합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이 분야의 인재들은 최고 대우를 받지요.

우리나라에는 정병규씨를 비롯해 약 3백명의 북디자이너가 있습니다.

정씨의 경우 70년대 중반 "북"디자이너로 오해받을만큼 척박한 풍토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지요.

아직은 많은 전문가들이 표지 디자인에 치중하고 있다지만 이는 그만큼 개척할 여지가 많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기록에는 최초의 양장본이 1895년에 나온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라고 돼있습니다.

1910년대 딱지본(아이들 놀이의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된 표지)을 거쳐 금박 제목을 입힌 최남선의 호화본 "백팔번뇌"로 이어지는군요.

30년대에는 좌파 미술가들의 그림이 많이 쓰였고 40년대에는 판화,60년대에는 김환기 등 화가들의 삽화가 인기를 끌었답니다.

요즘도 하루 1백권 이상의 책이 태어납니다.

그중에는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도 많습니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영국의 21세기를 디자인으로 부흥시키자"고 제안한 걸 기억하시지요.

디자인이야말로 창의성의 뿌리이자 무한한 부가가치의 열매죠.

"디자인이 생산에 선행된다"는 전제도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마침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21일부터 9월6일까지 "일본현대 북디자인"전시회가 열립니다.

"세계 디자인의 흐름"중 첫번째 행사로 독특한 작품 4백여점을 선보입니다.

출품자들은 우리나라의 몇몇 뛰어난 북디자이너처럼 동양전통과 조형미를 현대감각으로 빚어낸 예술인들이지요.

이들과 함께 우아한 품격의 "연인"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려보세요.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