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가을 오후4시쯤 몸집은 크지 않으나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에 들어오는 분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대우의 김우중 사장이다.

그때 김우중 사장은 전경련 부회장의 한 분이었다.

필자가 일어서 김 사장을 맞이하자 "형님,저를 도와주셔야 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김우중 사장의 말이다.

"지금 김용환 재무장관을 만나 영국과 합작하는 금융회사에 대우도 끼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금융회사 문제는 전경련 김입삼 부회장이 하는 일이니 김 부회장과 상의하라고 합디다"

김우중 사장은 일사천리로 부탁사항을 설명했다.

"김용환 장관 말씀대로 한.영 경협위에서 합작금융회사 설립을 정식으로 결정했고,영국측 투자회사로 라자드 브라더스(Lazard Brothers)등이 내정됐습니다. 한국측 투자자는 한.영 경협위원회에서 토의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금융사업은 공익성이 강한 만큼 한 두 회사의 소유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신설될 영국합작금융회사도 한 회사의 주식소유한도를 20%로 전경련에서 정했습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김우중 사장은 "알겠습니다. 그 원칙에 따를 테니 대우도 참가 기회를 주십시오.부탁합니다"

"정세영 한.영 위원장과 상의해서 처리하겠습니다"

당시 한.영 위원장은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정세영 사장으로 바뀌었다.

이런 사연을 거쳐 첫 설립되는 한.영 합작금융회사 지분은 현대.대우.전방 등 5개 사가 20% 범위내에서 자본참여를 하게 됐다.

이미 언급한 70년대초 민간은행 설립안에서 전경련은 금융사업의 공익성에 비춰 주식소유의 상한선을 8%로 정했다.

필자는 금융회사나 언론사 같은 공익성이 강한 사업은 투명 경영과 주식 분산,그리고 소유와 경영의 분리 철칙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이같은 필자의 생각은 전경련이 "한국경제신문" 매입 때에도 그대로 지켜졌다).

전경련은 73년 "한.불",74년 "한.영 경제협력위원회"를 설립 운영하게됨에 따라 매년 유럽에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파견하게 됐다.

한국이 불.영과 협력위를 가동한다는 사실은 독일 경제인들을 분발시켰다.

전경련은 1975년 독일 경제인연합회(BDI)와 협의해 같은 해 "한.독 경협위"를 설립키로 했다.

위원장으로는 독일과 관계가 깊은 LG의 구자경 회장을 선임했다.

독일측도 적극 나서 니콜푸스 파솔트(Nikolfus Fasolt)박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독.한 경협위를 5월15일 발족시켰다.

이어 1976년 4월8일 서울에서 1차 합동회의를 가졌다.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투자촉진을 위한 투자진흥센터 설치와 한.독 경영.기술훈련기구 설립 등이 합의됐다.

독일은 이승만 정부때 미국 외에 한국과의 경협에 가장 먼저 관심을 나타낸 나라였다.

1950년대 후반에 이미 대외협력기금을 설치,대한원조도 추진하고 있었다.

민간 경제계에서 독일차관을 제일 먼저 착안한 분은 이병철 삼성 회장으로 알고 있다.

그는 1960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비료공장 건설자금으로 독일차관 도입을 상의했다.

4.19이후 창설된 경제계 총본산 한국경제협의회(회장 김연수 삼양사 창업자)는 "태백산 종합개발"에 독일협력자금 투입을 추진했다.

이때 이미 독일정부도 기술협력과 자금 지원을 제시하고 있었다.

5.16군사정부도 민주당 정부가 추진했던 서독 경협만은 그대로 추진해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방문으로 이어졌다.

전 전경련 상임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