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근 < 인천대 교수.국제금융 >

1980년대 말 미국의 유력 컨설팅회사인 BCG는 향후 10년내에 세계 자동차산업은 "빅 10"구도로 압축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일본의 4대 메이커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닛산은 프랑스의 르노로,미쓰비시는 다임러크라이슬러로 넘어갔다.

한국자동차 산업도 전면 외자 지배체제로 넘어갈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미국계 맥킨지사는 최근 한국의 은행산업에 대해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놓았다.

20여개 은행이 난립하고 있는 현 상황은 분명히 과잉서비스공급-과당경쟁을 유발,가뜩이나 부실이 심한 은행의 수익성을 압박하므로 결국 4~5개사 체제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BCG가 자동차산업의 재편을 예견할 때 그들이 제시한 논거는 기술개발 경쟁에 있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므로 규모의 경제가 없이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결과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미국-유럽업체간 전략적 제휴체제에 무릎을 꿇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전망은 적중했지만,기실 그 원인은 전혀 다른데 있었다.

일본은 금융버블의 붕괴가 초래한 장기불황이 원인으로 작용했고,한국은 IMF외환위기로 인해 높아진 금융비용을 견디지 못해 낙마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들 보고서에 과도하게 영향을 받은 나머지 한국과 일본의 업체들이 같이 무리하게 시설확장 투자를 감행했고,이것이 금융위기와 결합되면서 파국을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현재 정부가 취하고 있는 은행업의 대형화.겸업화 전략은 다시 한번 "알아서 기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사실 은행업은 자동차와 달리 글로벌 경쟁산업이라기 보다는 내수형산업이다.

서방 컨설팅업체는 사이버화의 추세가 국경을 허물고 있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지만 적어도 순수 상업은행업에 관한한 여전히 국내저축을 동원하고 이를 기업대출로 전환하는"로컬 산업적"특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난 7월12일 노정합의에 따르면 앞으로 논란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어떠한 형태건 연내에 금융부문의 2차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10월중 독립적 경영평가위원회를 구성해서 개별은행이 제출한 경영정상화계획을 검토하고,독자 회생이 불가능한 은행들을 중심으로 통폐합을 단행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은행업의 압축재편만이 살길이라는 정부의 "주입된"선입관이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단연코 잘못된 수순이다.

이에 앞서 정부는 한국의 은행업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재정립해야 한다.

은행업은 "거리두기"관계의 자본시장과는 달리 장기적 투자를 꾸준히 지원하는 "헌신적"자본으로서의 특성이 있다.

이것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위험성이 높고 자본의 회임기간이 매우 긴 반도체산업에 대한 전략적 투자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벤처성의 정보산업 발전을 위해 코스닥시장의 육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은 서방 선진국과 달리 향후 20~30년은 전통적 제조업의 혁신으로 국부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후발의 이점이 살아있는 나라다.

진정 그렇다면 "국적있는"은행업을 지켜낸다는 것은 절대적인 선행조건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정부는 경영평가위원회를 뒤늦게 발족해서 기계적인 평가작업만을 맡기려 하지 말고,이를 하루빨리 구성.가동해야 한다.

국민경제발전에 있어서 은행업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고,BIS자본비율 일변도가 아닌 종합적인 기준을 설정해서 은행업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

또 전체 산업지형을 감안,과연 은행업에서 과잉서비스공급-과당경쟁의 폐해가 발생하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산업전반에 대한 총체적 시야를 결여한 채,개별은행의 생사 여부를 가리는 것은"경제주권 상실,금융 종속,제조업 하청생산기지화"한 멕시코의 전철을 밟는 파국의 시나리오일 뿐이다.

< 이찬근 인천대 교수 / ckl1022@lion.inchon.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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