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 경제환경 급속 악화 ]

1977년 대망의 수출목표 1백억달러를 달성했다.

연말이면 단돈 2천만∼3천만달러의 보유외화 부족으로 온 나라가 쩔쩔매던 60년대의 감회가 새삼스럽다.

나무가 크면 바람도 거센 법.한국경제를 둘러싼 문제들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국 경쟁력 약화에 따른 달러방위정책은 즉각 한국경제에 압박을 가해왔다.

설상가상으로 지역간 경제대립의 격화,오일달러의 급부상,강대국의 세계경제 견인차 역할 포기 등으로 국제경제는 침체로 접어들었다.

이에 대응할 한국의 대외협력은 새 패러다임을 요구했다.

미ㆍ일을 넘어 경협의 다변화가 초미의 급선무로 대두됐다.

특히 오일달러의 중동,동구권 등 신시장이 새로 주목을 끌었다.

이들 개척은 관과 민이 따로 따로 할 것이 아니라 혼연일체의 합동사절단 파견이 절실하게 됐다.

77년 8월 전경련은 대구주ㆍ동구권 경제외교 장기구상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77년 8월26일부터 9월21일까지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에 관민합동 경제사절단을 파견했다.

단장은 장예준(張禮俊) 상공장관이 맡았으며 박필수 차관,김선길 차관보 등이 가세했다.

경제계에서는 남궁련(南宮鍊)한ㆍ노르웨이 위원장,조석래(趙錫來) 한ㆍ덴마크위원장,손상모(孫尙模) 한ㆍ스웨덴위원장등 20여명이 참가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전경련은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위스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 전 유럽을 망라한 경제협력망을 설치했다.

곧이어 김덕중(金德中) 대우그룹 사장이 한ㆍ이(伊)위원장을 맡고 캐나다와의 협력기구도 설립됐다.

이중에서 필자가 각별히 관심을 둔 나라는 스위스와 핀란드였다.

유럽 어느 나라나 한국이 배울 것은 많지만 특히 스위스 핀란드는 우리가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위스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77년 3월 필자는 사절단과 함께 스위스를 방문했다.

세계 향수 원료의 70%를 생산하는 시버 가이기사와 현대중공업에서 구입한 최고급 선박엔진 생산공장도 시찰했다.

향료의 마지막 점검을 남녀가 코로 직접하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비즈니스상 영어도 필수다.

필자가 만난 젊음이들의 어학 실력은 부러울 정도로 뛰어났다.

그들은 장차 유엔 근무나 신문기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흔히들 스위스는 수려한 자연,영구무장중립(永久武裝中立),직접민주주의를 갖춘 지상낙원이라고 한다.

이 낙원을 이룩하기까지는 땀과 눈물,심지어 ''피까지 수출한'' 고난의 역경이 있었다.

1800년초 나폴레옹이 스페인 침공시 용병으로 참전한 스위스출신 병사들이 서로 적이 되어 싸우게 됐다.

백병전(白兵戰)이 벌어지는 찰나,똑바로 보니 아버지와 아들의 맞대결 직전이었다는 비극적인 애화가 전해진다.

한때는 인구의 15%이상(30만명)이 용병으로 해외에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살아남은 스위스 용병들은 피로 번 돈으로 벨기에 등에서 중고 방직기를 한두대 사가지고 귀국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최고 품질의 스위스 방직공업의 시초다.

또 시계등 스위스 정밀공업은 세계 으뜸이다.

항구가 없는 스위스는 라인강을 따라 제품을 해외에 주로 반출했다.

봉건영주들은 라인강편에 촘촘히 초소를 세워 통과하는 물품 크기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다.

약삭 빠른 스위스 기업인들은 제품을 되도록 작게 만들어 세금을 낮췄다.

이는 스위스 정밀공업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했다.

前 전경련 상임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