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속의 협력을 뜻하는 ''코피티션(co-opetition)''이라는 신조어가 처음 소개된 것은 지난 96년이었다.

배리 네일버프 예일대 교수와 아담 브랜든버그 하버드대 교수가 책을 공동 저술하면서 제목을 ''코피티션''이라고 정한 것이 계기였다.

업종별로 라이벌 기업간의 제휴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경영학적으로 분석한 책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신조어를 만든 사람은 따로 있다.

인터넷 소프트웨어 회사인 노벨사의 레이몬드 누어다 전 사장이다.

그는 정보통신 혁명이 본격 도래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기업간 경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갓 걸음마를 시작한 인터넷 등 신생업종의 시장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는 우선 경쟁기업들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일단은 제휴를 통해 시장에서의 전체 파이를 키우고,그런 연후에 각 기업별로 몫을 늘리기 위한 경쟁을 벌여도 늦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누어다 사장의 이런 판단은 미국의 정보통신 관련 기업인들 사이에 이심전심으로 공유됐다.

인터넷 포털분야의 간판업체인 야후사가 또 다른 포털업체 알타비스타의 운영회사인 CMG사와 제휴하고,웹 브라우저 시장에서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넷스케이프의 아메리카 온라인(AOL)사와 익스플로러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고속케이블 인터넷 비즈니스인 로드 러너(Road-runner)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키로 한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코피티션은 디지털 혁명기를 맞은 21세기 미국기업들의 새로운 키워드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1980년대가 합작투자의 시기였고,90년대는 국경을 뛰어넘은 제휴의 연대였다면 디지털 혁명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지금은 기업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개념 자체가 바뀌고 있는 시기다.

하이테크 및 인터넷 분야의 선도기업들에 의해 이전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새로운 ''기업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제임스 무어 지오파트너스 기업연구소 회장)

기업 정체성에서까지 ''퓨전''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코피티션은 몇 가지 양상을 통해 미국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배가하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차투자(cross-investing)를 통해 기업간에 ''피''를 섞기도 하고 자사 대리점에 경쟁사의 제품을 함께 팔면서 소비자들의 선택 폭을 넓혀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라이벌 업체에 핵심 부품을 공급해 주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IBM이 지난해 라이벌 회사인 델컴퓨터에 주요 부품을 수년간에 걸쳐 공급해 주기로 하는 1백60억달러짜리 계약을 맺은 것이 단적인 예다.

미국기업들이 이처럼 전에는 상상하기 조차 힘들었던 ''적과의 동침''에 과감하게 나서고 있는 것을 ''글로벌 패권 전략''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소수의 시장 선도기업들끼리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후발업체들이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경쟁력을 강화한 뒤 시장을 나눠 먹으려는 전략이 깔려 있다는 인식이다.

''코피티션을 통한 시장과점론''이다.

미국에서는 자동차산업이 막 고개를 들었던 지난 1910년대에도 수십개의 자동차회사들이 난립하자 소수의 대형업체들이 부품 표준화 등의 ''코피티션''을 통해 업계를 ''정리''한 바 있다.

산업전문가들은 향후 인터넷 등 정보통신 관련 신산업분야에서 이른바 ''넷바쓰(netbatsh) 시대''가 열릴 날이 멀지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인터넷과 전전(戰前) 일본식 재벌을 가리키는 ''자이바쓰''의 합성어인 넷바쓰는 말 그대로 인터넷 분야의 신재벌을 뜻한다.

최근 AT&T 타임워너 AOL 스프린트 등 정보통신분야의 유력기업들끼리 합작투자와 M&A,제휴 등이 난무하고 있는 것은 기업간 비즈니스 퓨전을 통해 ''넷바쓰''를 일궈내려는 본격적인 몸짓이라는 분석이다.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