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임 < 소설가.ji2958@hitel.net >

바캉스란 원래 텅 빈다는 뜻이다.

본래의 일상에서 떠나 휴지기를 갖는 동안의 공동(空洞)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부분 7월 하순부터 8월 초순까지 휴가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

그 열흘 중 며칠 동안 의무처럼 ''휴가 작업''을 해치워야 한다.

발현될 수 없는 내면의 찌꺼기를 비워내고 새로운 창조적인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 아니라 휴가 후유증에 시달릴 정도로 심신을 탕진한다.

출판사 의뢰를 받고 취재차 파리에 와보니 출근길 도로는 텅 비어 있고 인도는 온종일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이방인들로 넘쳐난다.

광장의 다채로운 언어들 속에 섞여 있다 보면 미국의 독주에 힘입어 프랑스가 전 방면에서 상승기를 맞고 있음을 실감한다.

월드컵 우승에 이어 유럽컵 챔피언으로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자존심이 콩코드기의 추락으로 한순간에 바닥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국익의 수위를 달리는 관광 사업만은 조금도 영향 받지 않는 듯하다.

센 강의 유람선은 해가 정수리를 비출 때부터 쉴 새없이 강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고,샹젤리제나 생 제르맹 데 프레 대로의 카페 의자들은 해그림자가 서쪽으로 이동할수록 밖으로 밖으로 자리를 넓혀간다.

퐁 뇌프 다리에 기대 서서 불어오는 미풍에 가슴을 내주며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면 불과 2~3일 전의 과거와 2~3일 앞의 미래 사이가 깊이 모를 벼랑의 단절 만큼이나 까마득하다.

눈을 뜨면서 TV 뉴스를 켜고,e메일을 챙기며,수시로 전화에 응답해야 하는 일상에서 이만하면 멋지게 탈출한 것인가? 그것도 파리로!

올 여름엔 아이와 배낭 메고 정선 아우라지나 해남 아니면 영덕 어름 쯤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이와 원치 않은 생이별까지 하고 노트북과 한몸이 되어 파리로 날아 왔으니,제아무리 보석 같은 파리라 해도 그다지 곱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

자동차 대신 전철을 타고,그것도 말고 온종일 두 발로 걸어다니다 아픈 다리를 쉬러 센 강둑이나 벤치에 앉아 나와 무연히 돌아가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노라면 내가 두고 온 삶과 얼굴들이 오히려 가깝게 다가온다.

그들의 소중함을 깨닫고,미덕을 되새기며,한없는 그리움을 키운다.

비록 사막을 가는 낙타처럼 일을 등에 지고 앉았다 해도,바로 그 순간의 자유와 삶의 반추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일상의 휴지기,바캉스를 위해 1년을 노동한다는 이곳 파리지엥들이 새삼 다시 보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