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입삼 회고록 '시장경제와 기업가 정신'] (114) '전경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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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련 주도 77년 출범 ]
1977년 9월8일 관민합동사절단은 헬싱키를 방문했다.
서울은 아직 더위가 한창일텐데 북극에 가까운 그곳은 가을이 성큼 와 있었다.
도착 이튿날 우선 사우나 대접을 받았다.
핀란드의 손님접대 풍습이라고 했다.
필자의 상대는 뤼트케넨 순회대사.
그는 2년전 방문했던 소련공산당 흐루시초프도 바로 그 사우나에 초청했다고 했다.
순회대사는 사우나를 하면서 흐루시초프가 한 말을 필자에게 이렇게 전했다.
"1939년 겨울전쟁(소련이 레닌그라드 방위 구실로 핀란드에 20㎞ 후퇴를 강요하고 침공한 전쟁) 초기에 소련은 인구 3백만명인 작은 핀란드에 밀리게 됐다오.그래서 소련은 타타르 체첸 몽골족 등 소수민족을 총동원해 핀란드 전선에 총알받이로 내몰았소.스탈린은 핀란드 침공을 골치 아픈 이들 소수민족의 청소기회로도 삼은 셈이지요"
얘기를 돌려 필자가 20년동안 전경련 근무에서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 ''의료보험조합협의회''설립에 관해 언급하겠다.
1975년 여름 아이들을 데리고 서해안 비인에 있는 이화여대 캠프에 갔다.
한양대 의과대 교수도 함께 왔다.
평소 친교가 있는 한양대 김 교수는 의료보험제도를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오늘 아침 이곳으로 오기 직전 중년 아주머니가 고열로 신음하는 아이를 데리고 왔소.입원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텐데 옷차림 등으로 보아 입원비를 감당할 것 같지 않고.그러니 어떡하오.주사 놓고 약을 듬뿍 주고는 ''이 약을 먹고 조리하면 나을 것''이라며 의사로서 양심에 가책받는 말로 돌려보냈다오.지금 내 심정은 매우 우울하고 비참하오"
이 사연을 듣고는 전경련에서 ''의료보험제도''를 추진할 것을 결심했다.
이때 이미 의료보험은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그 혜택을 못받았다.
걸프(Gulf)정유사나 대한항공 등에서 ''사내의료보험''으로 노사 공동부담하에 실시하고 있었다.
이들을 참고해 밤을 새워가면서 성안해 전경련 이사회에 올렸다.
그런데 뜻밖에 중진들로부터 반대의견이 나왔다.
"사무국은 회원사들이 돈 버는 방안은 마련치 않고 돈 들어가는 일만 꾸미는데,어떻게 된 것이오"
여기 저기서 반대의견이 터져 나왔다.
낭패였다.
이때 김용완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반대 의견을 잘 들었습니다.여러분이 자유경제나 자본주의를 원하신다면 종업원을 위해 의료보험같은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우리 경방에서는 1930년대부터 의료보험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김 회장의 이 한마디에 ''의료보험안''은 통과됐다.
그런데 최종단계에서 기획원과 보사부 사이에 의견이 대립됐다.
기획원은 국가보험으로,보사부는 기업보험을 주장했다.
필자도 신현확 보사부 장관 요청으로 청와대 의료보험 실무회의에 참석했다.
이희일 경제수석,기획원 김재익 국장,보사부 최수일 담당국장 등이 참석했다.
갑론을박….
참다못해 필자는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영국은 국가보험제도의 적자로 허덕인다.자기부담 원칙하에 ''기업의료보험''부터 시작해 점차 확대합시다"
1977년 1월13일 드디어 전국의료보험협의회가 설립되고 필자가 초대회장으로 피선됐다.
민간 경제계가 자진해 의료보험제도를 마련한 예는 우리 한국외에 없다.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
1977년 9월8일 관민합동사절단은 헬싱키를 방문했다.
서울은 아직 더위가 한창일텐데 북극에 가까운 그곳은 가을이 성큼 와 있었다.
도착 이튿날 우선 사우나 대접을 받았다.
핀란드의 손님접대 풍습이라고 했다.
필자의 상대는 뤼트케넨 순회대사.
그는 2년전 방문했던 소련공산당 흐루시초프도 바로 그 사우나에 초청했다고 했다.
순회대사는 사우나를 하면서 흐루시초프가 한 말을 필자에게 이렇게 전했다.
"1939년 겨울전쟁(소련이 레닌그라드 방위 구실로 핀란드에 20㎞ 후퇴를 강요하고 침공한 전쟁) 초기에 소련은 인구 3백만명인 작은 핀란드에 밀리게 됐다오.그래서 소련은 타타르 체첸 몽골족 등 소수민족을 총동원해 핀란드 전선에 총알받이로 내몰았소.스탈린은 핀란드 침공을 골치 아픈 이들 소수민족의 청소기회로도 삼은 셈이지요"
얘기를 돌려 필자가 20년동안 전경련 근무에서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는 ''의료보험조합협의회''설립에 관해 언급하겠다.
1975년 여름 아이들을 데리고 서해안 비인에 있는 이화여대 캠프에 갔다.
한양대 의과대 교수도 함께 왔다.
평소 친교가 있는 한양대 김 교수는 의료보험제도를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오늘 아침 이곳으로 오기 직전 중년 아주머니가 고열로 신음하는 아이를 데리고 왔소.입원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텐데 옷차림 등으로 보아 입원비를 감당할 것 같지 않고.그러니 어떡하오.주사 놓고 약을 듬뿍 주고는 ''이 약을 먹고 조리하면 나을 것''이라며 의사로서 양심에 가책받는 말로 돌려보냈다오.지금 내 심정은 매우 우울하고 비참하오"
이 사연을 듣고는 전경련에서 ''의료보험제도''를 추진할 것을 결심했다.
이때 이미 의료보험은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그 혜택을 못받았다.
걸프(Gulf)정유사나 대한항공 등에서 ''사내의료보험''으로 노사 공동부담하에 실시하고 있었다.
이들을 참고해 밤을 새워가면서 성안해 전경련 이사회에 올렸다.
그런데 뜻밖에 중진들로부터 반대의견이 나왔다.
"사무국은 회원사들이 돈 버는 방안은 마련치 않고 돈 들어가는 일만 꾸미는데,어떻게 된 것이오"
여기 저기서 반대의견이 터져 나왔다.
낭패였다.
이때 김용완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반대 의견을 잘 들었습니다.여러분이 자유경제나 자본주의를 원하신다면 종업원을 위해 의료보험같은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해야 합니다.우리 경방에서는 1930년대부터 의료보험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김 회장의 이 한마디에 ''의료보험안''은 통과됐다.
그런데 최종단계에서 기획원과 보사부 사이에 의견이 대립됐다.
기획원은 국가보험으로,보사부는 기업보험을 주장했다.
필자도 신현확 보사부 장관 요청으로 청와대 의료보험 실무회의에 참석했다.
이희일 경제수석,기획원 김재익 국장,보사부 최수일 담당국장 등이 참석했다.
갑론을박….
참다못해 필자는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영국은 국가보험제도의 적자로 허덕인다.자기부담 원칙하에 ''기업의료보험''부터 시작해 점차 확대합시다"
1977년 1월13일 드디어 전국의료보험협의회가 설립되고 필자가 초대회장으로 피선됐다.
민간 경제계가 자진해 의료보험제도를 마련한 예는 우리 한국외에 없다.
전 전경련 상임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