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 강의 중에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시는 사기 쳐도 소설은 사기 못친다'' 원고지를 백장씩 메워야 하는 소설은 그야말로 ''노동''이다.

반면 이미지에 의존하는 짧은 시는 눈속임이 가능하다.

난해한 현대시 때문에 의심이 생겨났겠지만 유혹적인 언어로 꽃단장한 ''사이비''시도 많다.

''엽기''란 말조차 심드렁해진 시대,고두현(37)씨의 첫 시집 ''늦게 온 소포''(민음사)는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노래처럼 평화롭다.

고즈넉한 음조는 12대의 첼로가 연주하는 가곡 ''보리밭''을 연상시킨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는 데에 무슨 수사(修辭)가 있는가.

인간의 정서는 은근하게 통한다.

''청동바람이/종을 때리고 지나간다/화들짝 놀란 새가/가슴을 친다//좌로 한뼘쯤 기우는 하늘//별똥별이/내 몸속으로/빗금을 치며 지나간다''(''빗살무늬 추억'' 전문)

당신의 상처는 어떤 무늬냐고 묻는 듯한 이 시에는 방점을 찍기 위해 잠깐 멈추어야 할 단어가 없다.

시인은 마음에 단도 한자루 박혀있다고 하지 않는다.

스쳐지나가는 것이 슬쩍 베었을 뿐이라고 한다.

주루룩 사선(斜線)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

시인은 붉은 빛을 별똥별이라고 주장한다.

환부는 새 생명을 잉태하는 자리로 탈바꿈한다.

''휴대폰 없이 산에서 지내는 동안/하늘색 공중전화가 있는/절마당까지 뛰어갔다가 동전은 못바꾸고/길만 바꿔 돌아올 때//보고 싶은 마음 꾸욱 눌러/돌무지에 탑 하나 올린다''(''보고싶은 마음'' 전문)

고씨의 시는 아날로그 녹음에 아날로그 재생이다.

첨단기법으로 잡음을 제거한 디지털 CD가 판치는 세상에서 시인은 그윽한 세계로 가는 또 다른 문을 열어보인다.

낡은 SP 복각음반 같은 시에는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소년의 모습이 겹쳐진다.

시인이 고향땅 경남 남해에 귀양살았던 서포 김만중을 자주 떠올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어머님 날 낳으니/유복자,아버지 얼굴 모르는 것으로 평생 가슴에 돌 얹고 살았더니//…조각배 위에서 태어나 유배의 섬에 와 갇힌/나를 보러/아버님이 이렇게 오시는가''(''적소에 내리는 눈-유배시첩·4'' 부분)

그러므로 시인은 ''속절없이 눈 따가운 밤일수록 섣불리 돌아보지 말자''고 한다.

두타산 계곡에 누워 쩡쩡 얼음 깨지는 소리 들을지언정 ''혹한보다 더 시린 그대의 안부''는 끝내 묻지 말자고 한다.

''나는 보았네/빛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그분의 눈,캄캄한 하늘 등지고 태양을 마주본 죄/흑점 밖으로 단 한번도 펼쳐보인 적 없는 삼족(三足)의 넓이/나는 보았네,검은 것이/어떻게 가장 빛나는지''(''세발까마귀'' 전문)

''흑점 밖으로 펼쳐보인 적 없는''것은 ''심중에 맺혀있던 말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안으로 삼키자는 시인의 권유는 인내로서의 문학을 가르친다.

자신의 첫 시집이 ''늦게온 소포''처럼 배달되기를 바라는 고씨는 결코 늦게 올 수 없는 깨달음을 전한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출신.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