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조부와 외조모는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셨다.

두 분 다 지금은 세상을 뜨셨지만,그 분들은 생전에 일본에 대해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그 분들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아주 예의 바르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외조부나 외조모가 평소에 ''왜놈''이라는 말을 썼으면 썼지 한 번도 ''일본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설움이 덧쌓인 데서''왜놈''이라는 배타적 표현이 일상화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지레짐작일 따름이었다.

놀랍게도 두 분은 이따금 해방 전에 일본에서 살았을 때가 좋았노라고 푸념 비슷한 말씀을 내뱉곤 하셨다.

아마도 얼마 되지 않는 논밭뙈기 농사를 지어 생활을 꾸려 가는 일이 팍팍하게 여겨질 때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적잖게 헷갈리는 것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대로라면 근대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자로서 우리를 못살게 군 나라일 뿐이었다.

도대체 왜놈의 나라가 뭐가 그리 좋다고!

어린 나의 일본관은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머리가 좀 굵어져서 세계명작의 반열에 오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또 나쓰메 소세끼의 치밀한 문체를 읽고,근래엔 무라카미 하루끼와 아사다 지로를 읽고,국내에 들어온 거의 모든 일본영화를 보았지만 나는 아직 일본도,일본 사람도 잘 모른다.

일본은 나에게 여전히 모호하고,풀리지 않는 숙제 같은 나라일 뿐이다.

그것은 일본이 우리를 바라보는 태도가 모호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은 과거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기회 있을 때마다 공공연하게 미화하는가 하면,얼토당토 않게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극우적 발상이 버젓이 일본 내에 존재하는 한 일본은 여전히 우리에게 늦출 수 없는 경계의 대상이다.

또 정신대 문제에 대한 책임있는 사과와 배상을 기피하고 있는 점도 그들의 몰염치를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국권을 되찾은 지 쉰다섯해가 흘렀다.

이제는 일본 사람을 구태여 왜놈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의한 껄끄러운 관계 청산과 함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한가지 있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일본 흉내내기가 바로 그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지금 우리 사회의 문화,엔터테인먼트라고 자부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 문화를 따라하는 데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일본에서 직수입된 ''집단 괴롭힘''과 ''학급 붕괴''와 ''원조 교제''등은 어느새 우리 사회의 못된 상징처럼 되어버린 지 오래다.

서구 자본주의를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받아들인 일본은 경제적으로 우리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경제적 풍요가 가져온 문화적 혜택이 모두 삶의 풍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읽은 ''어처구니없는 엄마들과 한심한 남자들의 일본''이라는 책은 일본인이 쓴 일본인 비판서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돈을 얻은 대신에 인간의 활력과 지혜를 잃은 전후 현대 일본인을 아프게 꼬집고 있다.

''부패했음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태연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브랜드 상품에 미친 사람들,아이에게 에너지를 쏟는 엄마들,엄마에게 지배되는 남자들,여성의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남자들,대가족제도가 그리운 아이들,지나치게 유치한 대학생들,취미라는 허울로 낭비를 일삼는 여성들,명쾌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정치가들,조잡한 일본어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쉽게 극단으로 치닫는 사람들''….

이 책의 차례에서 뽑아낸 소제목들인데,이 말들이 한국인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렇다면,정말 우리 속에 벌써 일본이 들어와 있다는 말인가?

/ ahndh@chollian.net

---------------------------------------------------------------

<>필자 약력=<>원광대 국문과 졸업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그리운 여우'' ''그대에게 가고 싶다'' ''어른을 위한 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