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서 그랬지요. 그렇지만 이제 왔잤아요"
북한 촬영감독 하경(74)씨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50년전의 아내 김옥진(78)씨를 17일 오후 숙소인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마주 대하고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아내 김씨도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만나라고 이틀동안 어머니를 설득했던 문기(55) 정기(54) 승기(51)씨 등 세 아들들은 그러나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렸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눈물도 잠시,연애결혼을 했던 이들은 반백년 지나버린 옛 추억을 되살리며 금방 얘기꽃을 피웠다.
하씨는 옛 부인을 꼭 껴안아 주었다.
김씨도 준비해온 선물인 선글라스를 끼워주었다.
하씨는 서울에 도착한 직후부터 어지간히 애간장을 태웠다.
옛 아내에게 죽기전 마지막 속죄라도 하고싶어 이틀간 잠을 설쳤던 하씨의 애틋한 "망부가"에도 불구,김씨가 선뜻 전 남편앞에 나서기를 주저했기 때문.수절하지 못한 죄책감,재혼해 낳은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이 겹쳐 김씨는 혼자 그리움을 삭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차남 정기씨는 "우여곡절끝에 호텔까지 어머님을 모시고 왔지만 먼발치에서 아버님을 보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으시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전날 아들의 손에 이끌려 워커힐호텔 근처까지 왔지만 끝내 전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
광업진흥공사 사무원이던 하씨는 1945년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김씨와 결혼,사내커플 소문났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부부는 헤어졌고 김씨는 세아들을 시집에 맡기고 재혼했다.
하씨는 26세부터 42년간 "꽃파는 처녀" "안중근과 이등박문" 등 70편 가량의 영화를 제작하고 8년전 은퇴했다.
국기훈장 1급,노력훈장 등을 받을 정도로 북한 영화계의 거물이다.
강창동 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