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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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고 난 직후인 1945년 8월 21일,징용으로 끌려갔던 한국인을 가득 실은 4천3백70톤급 해군수송선 우키시마(浮島)호가 부산을 향해 아오모리(靑森)현 오미타노(大溱)항을 출발했다.
그리고 24일 우키시마호는 마이즈루만(舞鶴灣)입구에서 폭발사고로 두동강이 난 채 침몰했다.
당시 일본의 공식발표로는 미 점령군의 정선명령에 따라 만으로 들어가다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부딪친 것이 폭발원인이고 승선인원 3천9백90명 중 한국인 5백24명,일본인 승무원 25명이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실종자는 1천여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생환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승선했던 사람은 5천~7천5백명이나 됐고 사망자도 5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시신인양작업이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 뒤에도 일본정부는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다.
일부 일본 지식인들에게 ''우키시마호사건은 패전의 좌절감에 빠져 있던 군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한국인 집단살인극''이란 단죄를 받은 것도 억지로 진실을 은폐하려드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즈루만 언덕에는 해방된 조국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원통하게 수장당한 한국인의 원혼을 달래는 ''우키시마호 수난자 추도비''가 서 있다.
교토(京都)시민은 모금한 기금으로 95년 우키시마호사건을 다룬 영화 ''아시안 블루''를 제작해 부끄러운 과거를 사죄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사건의 명확한 진상규명이나 공식사죄, 희생자 생환자에대한 보상은 물론이고 유골반환요구도 외면해 왔다.
사건은 지금까지 수수께끼처럼 남아 일본인이나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고만 있다.
유족과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우키시마호 침몰 희생자 55주기 위령제가 오늘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다. 남북공동조사단 구성을 북한측에 제안하고 공개사과와 보상, 유골반환을 요구하는 서한도 일본 대사관에 전달할 것이라고 한다.
과거는 잊으려든다고 해서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일본정부는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우리 정부도 팔짱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24일 우키시마호는 마이즈루만(舞鶴灣)입구에서 폭발사고로 두동강이 난 채 침몰했다.
당시 일본의 공식발표로는 미 점령군의 정선명령에 따라 만으로 들어가다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부딪친 것이 폭발원인이고 승선인원 3천9백90명 중 한국인 5백24명,일본인 승무원 25명이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실종자는 1천여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생환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승선했던 사람은 5천~7천5백명이나 됐고 사망자도 5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시신인양작업이 있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 뒤에도 일본정부는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다.
일부 일본 지식인들에게 ''우키시마호사건은 패전의 좌절감에 빠져 있던 군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한국인 집단살인극''이란 단죄를 받은 것도 억지로 진실을 은폐하려드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즈루만 언덕에는 해방된 조국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원통하게 수장당한 한국인의 원혼을 달래는 ''우키시마호 수난자 추도비''가 서 있다.
교토(京都)시민은 모금한 기금으로 95년 우키시마호사건을 다룬 영화 ''아시안 블루''를 제작해 부끄러운 과거를 사죄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사건의 명확한 진상규명이나 공식사죄, 희생자 생환자에대한 보상은 물론이고 유골반환요구도 외면해 왔다.
사건은 지금까지 수수께끼처럼 남아 일본인이나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고만 있다.
유족과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우키시마호 침몰 희생자 55주기 위령제가 오늘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다. 남북공동조사단 구성을 북한측에 제안하고 공개사과와 보상, 유골반환을 요구하는 서한도 일본 대사관에 전달할 것이라고 한다.
과거는 잊으려든다고 해서 영원히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일본정부는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우리 정부도 팔짱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