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백남준 그리고 미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함정임 < 소설가 ji2958@hitel.net >
내가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마티스나 자코메티,미로 같은 현대작가의 작품들과 만날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보기 위해서다.
퐁피두 대통령의 이름을 딴 종합센터건물 4,5층을 쓰는 미술관은 뉴욕의 현대미술관 모마나 구겐하임에 뒤지지 않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우리나라 관람객 중 특히 젊은 학생층에게 인기가 있다.
10년 전 퐁피두에 왔을 때 나는 백남준이란 아티스트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했다.
그의 비디오 아트와 처음 마주했을 때는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 제목에 홀렸었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예술가적 기발함과 창조적 직관이 어우러진 제목 아닌가.
가장 새로운 것은 가장 오래된 것에서 잉태된다는 진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글쟁이들이란 언어에 미혹된 사람들이다.
나는 미술 장르를 넘겨다 볼 때 나 나름의 감상법을 갖고 있다.
처음엔 제목을 의식적으로 보지 않고 작품만을 훑어보고,그 다음엔 제목과 함께 작품을,마지막에는 제목만 연결지어 본다.
제목을 되작이면서 순전히 나만의 주관적인 연결점을 찾아낸다.
그러면 작품에 따라 은밀한 전율이 일거나,어서 빨리 펜을 들고 싶은 강렬한 자극을 받는다.
화가의 눈은 시인의 눈을 겸해서 제목을 다루는 수준 또한 언어의 연금술사인 시인의 정도를 능가하는 경우가 많다.
TV 모니터를 일렬로 쌓아놓고 레이저 빛을 대각선으로 지나가게 한 ''달은 가장 오래된 TV''나 기타와 꽃,나뭇잎과 여체 등을 발랄한 색채로 구성한 마티스의 ''왕의 슬픔'' 앞에서 금방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그와 더불어 제목이 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평소 자기 마음에 걸린 작품앞에 서는 순간이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나는 미술관 벽에 걸린 실제 작품보다 화집에 인쇄된 카피본을 깊이 들여다보곤 한다.
이번에 퐁피두에서 얻은 게 있다면,미로와 클라인의 블루 계열 작품들이다.
긴 회랑을 거의 다 가서 백남준과 마티스의 매혹적인 제목들 저 너머,단순히 파랑이나 푸른이라는 색채어로 함의할 수 없는 순도 높은,그래서 보는 순간 빨려들어가 시각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온한 블루의 창공,블루의 대양,블루의 우주가 미로와 클라인의 캔버스 위에서 펼쳐진다.
그 앞에서는 시 저 너머의 세계,색으로 표현할 수는 있어도 언어로는 단순히 파랑이라고,클라인처럼 ''단색 파랑''이라고 제목 붙일 수밖에 없는,극도로 단순화된 깊은 세계를 읽을 뿐이다.
시처럼-.
내가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마티스나 자코메티,미로 같은 현대작가의 작품들과 만날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보기 위해서다.
퐁피두 대통령의 이름을 딴 종합센터건물 4,5층을 쓰는 미술관은 뉴욕의 현대미술관 모마나 구겐하임에 뒤지지 않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우리나라 관람객 중 특히 젊은 학생층에게 인기가 있다.
10년 전 퐁피두에 왔을 때 나는 백남준이란 아티스트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했다.
그의 비디오 아트와 처음 마주했을 때는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 제목에 홀렸었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예술가적 기발함과 창조적 직관이 어우러진 제목 아닌가.
가장 새로운 것은 가장 오래된 것에서 잉태된다는 진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글쟁이들이란 언어에 미혹된 사람들이다.
나는 미술 장르를 넘겨다 볼 때 나 나름의 감상법을 갖고 있다.
처음엔 제목을 의식적으로 보지 않고 작품만을 훑어보고,그 다음엔 제목과 함께 작품을,마지막에는 제목만 연결지어 본다.
제목을 되작이면서 순전히 나만의 주관적인 연결점을 찾아낸다.
그러면 작품에 따라 은밀한 전율이 일거나,어서 빨리 펜을 들고 싶은 강렬한 자극을 받는다.
화가의 눈은 시인의 눈을 겸해서 제목을 다루는 수준 또한 언어의 연금술사인 시인의 정도를 능가하는 경우가 많다.
TV 모니터를 일렬로 쌓아놓고 레이저 빛을 대각선으로 지나가게 한 ''달은 가장 오래된 TV''나 기타와 꽃,나뭇잎과 여체 등을 발랄한 색채로 구성한 마티스의 ''왕의 슬픔'' 앞에서 금방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그와 더불어 제목이 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평소 자기 마음에 걸린 작품앞에 서는 순간이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그래도 나는 미술관 벽에 걸린 실제 작품보다 화집에 인쇄된 카피본을 깊이 들여다보곤 한다.
이번에 퐁피두에서 얻은 게 있다면,미로와 클라인의 블루 계열 작품들이다.
긴 회랑을 거의 다 가서 백남준과 마티스의 매혹적인 제목들 저 너머,단순히 파랑이나 푸른이라는 색채어로 함의할 수 없는 순도 높은,그래서 보는 순간 빨려들어가 시각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온한 블루의 창공,블루의 대양,블루의 우주가 미로와 클라인의 캔버스 위에서 펼쳐진다.
그 앞에서는 시 저 너머의 세계,색으로 표현할 수는 있어도 언어로는 단순히 파랑이라고,클라인처럼 ''단색 파랑''이라고 제목 붙일 수밖에 없는,극도로 단순화된 깊은 세계를 읽을 뿐이다.
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