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술 안해도 취하는 세상 .. 권택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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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택영 < 경희대 영문학부 교수 roockie@unitel.co.kr >
아무래도 내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침이면 꼬박 꼬박 제시간에 출근하시던 아버지는 더위가 사람을 단단히 괴롭힐 작정을 하고 온몸을 끈질기게 쓰다듬는 여름날 오후면 옷을 벗고(물론 겉옷만) 마당으로 뛰쳐나가신다.
마당 한 끝에 붙은 꽃밭에서 큰 풀,작은 풀을 뽑고 가장자리에 다닥다닥 한 줄로 늘어선 회양목의 머리를 가다듬고 봄날에 제 구실을 다하고는 엉거주춤 달라붙은 찔레 덩굴을 말끔히 정리하신다.
지금은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고지에서 칫솔을 물고 제아무리 손을 움직여도 반쯤 감긴 눈이 끝내 열리지 않지만 그때는 마당에만 내려서면 눈꺼풀이 제풀에 화들짝 놀래곤 했다.
가장 정열적인 큰 입술의 주인공은 칸나.
시원시원한 줄기를 척척 늘어뜨리고는 그 사이에서 붉은 혀를 헤프게 드러낸다.
그 다음이 함박꽃이다.
키는 좀 작지만 역시 에누리없이 웃어준다.
아담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봉숭아의 붉은 웃음은 금방 푹하고 터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다.
차갑고 냉정한데도 자꾸만 끌리는 보랏빛 난초.
그런데 가장 귀여운 입술은 무엇일까.
아기 같고 천진해서 평생 걸음마를 모르는 채송화다.
아버지는 꽃밭 손질을 거의 마무리해 갈 때쯤이면 나를 부르셨다.
나는 곧장 텃밭으로 달려가 파랗고 어린 깻잎을 따서 물에 씻는다.
밀가루를 물에 풀어 깻잎을 슬쩍 적셔 팬 위에 부치면 근사한 즉석 술안주가 한 접시 된다.
노란 주전자에 담긴 차가운 막걸리와 김치를 곁들여 마루에 내놓으면 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게 한잔을 따라 주셨다.
주전자가 텅 빌 때쯤 되면 꽃밭은 내 눈앞에서 아름답게 춤을 추곤 했다.
집에 간혹 손님이 오면 어머니는 내가 신이 나서 갖다드리는 ''백화''라는 금딱지가 붙은 커다란 술병에서 노란 정종을 주전자에 담아 천천히 데우셨다.
그리고 손님들이 가고 난 뒤 상을 치우시면서 주전자를 깃발처럼 흔들었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선 채로 남은 술을 단 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한숨 푹 자고 나면 언제 마셨냐는 듯이 말짱했다.
아버지는 내게 술버릇을 알게 했고 어머니는 또 그것을 실력으로 키워주셨다.
그 후로 나는 아무리 마셔도 절대 남 앞에서는 정신을 잃거나 토하지 않는다.
간혹 집에 와서는 그럴망정.
세월이 흐르면서 내 술 실력도 예전 같지 못하다.
누구 말로는 연습을 안 해서 실력이 줄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술을 안 마셔도 빙빙 도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싶다.
진짜 꽃인가 만져보면 가짜이고,가짜겠지 만져보면 진짜니 취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아닌가.
아무래도 내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침이면 꼬박 꼬박 제시간에 출근하시던 아버지는 더위가 사람을 단단히 괴롭힐 작정을 하고 온몸을 끈질기게 쓰다듬는 여름날 오후면 옷을 벗고(물론 겉옷만) 마당으로 뛰쳐나가신다.
마당 한 끝에 붙은 꽃밭에서 큰 풀,작은 풀을 뽑고 가장자리에 다닥다닥 한 줄로 늘어선 회양목의 머리를 가다듬고 봄날에 제 구실을 다하고는 엉거주춤 달라붙은 찔레 덩굴을 말끔히 정리하신다.
지금은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고지에서 칫솔을 물고 제아무리 손을 움직여도 반쯤 감긴 눈이 끝내 열리지 않지만 그때는 마당에만 내려서면 눈꺼풀이 제풀에 화들짝 놀래곤 했다.
가장 정열적인 큰 입술의 주인공은 칸나.
시원시원한 줄기를 척척 늘어뜨리고는 그 사이에서 붉은 혀를 헤프게 드러낸다.
그 다음이 함박꽃이다.
키는 좀 작지만 역시 에누리없이 웃어준다.
아담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봉숭아의 붉은 웃음은 금방 푹하고 터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다.
차갑고 냉정한데도 자꾸만 끌리는 보랏빛 난초.
그런데 가장 귀여운 입술은 무엇일까.
아기 같고 천진해서 평생 걸음마를 모르는 채송화다.
아버지는 꽃밭 손질을 거의 마무리해 갈 때쯤이면 나를 부르셨다.
나는 곧장 텃밭으로 달려가 파랗고 어린 깻잎을 따서 물에 씻는다.
밀가루를 물에 풀어 깻잎을 슬쩍 적셔 팬 위에 부치면 근사한 즉석 술안주가 한 접시 된다.
노란 주전자에 담긴 차가운 막걸리와 김치를 곁들여 마루에 내놓으면 아버지는 언제나 나에게 한잔을 따라 주셨다.
주전자가 텅 빌 때쯤 되면 꽃밭은 내 눈앞에서 아름답게 춤을 추곤 했다.
집에 간혹 손님이 오면 어머니는 내가 신이 나서 갖다드리는 ''백화''라는 금딱지가 붙은 커다란 술병에서 노란 정종을 주전자에 담아 천천히 데우셨다.
그리고 손님들이 가고 난 뒤 상을 치우시면서 주전자를 깃발처럼 흔들었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선 채로 남은 술을 단 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한숨 푹 자고 나면 언제 마셨냐는 듯이 말짱했다.
아버지는 내게 술버릇을 알게 했고 어머니는 또 그것을 실력으로 키워주셨다.
그 후로 나는 아무리 마셔도 절대 남 앞에서는 정신을 잃거나 토하지 않는다.
간혹 집에 와서는 그럴망정.
세월이 흐르면서 내 술 실력도 예전 같지 못하다.
누구 말로는 연습을 안 해서 실력이 줄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술을 안 마셔도 빙빙 도는 세상이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싶다.
진짜 꽃인가 만져보면 가짜이고,가짜겠지 만져보면 진짜니 취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