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그로스 < 김&장 법률사무소 국제변호사 lawkim@kimchang.com >

지난 8월 중순 우리 가족은 부산시외에 있는 장인 묘지를 찾았다.

그날 나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돌아가신 장인어른을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장인어른 묘소옆에 준비해 둔 장모를 위한 빈 무덤탓이었다.

올해 86세의 한국인 장모님은 내 인생에 무척 소중한 분이시다.

19년전인 지난 81년 미국 뉴욕의 케네디공항에서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신 장모님을 처음 만났다.

아내보다도 키가 작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장모님과 언어가 다르니 원만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장모님은 다른 걱정을 하고 계셨다.

장모님은 아내에게 ''사위 코에는 늘 빨간 여드름이 나 있는지''를 물으셨다.

아내는 여드름은 일시적 현상이고 사실은 내가 잘 생겼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야 했다.

여드름이라는 첫 장애를 넘은 뒤 장모님은 나를 좋아하게 됐고 지난 19년간 우리는 논쟁 한번없이 살았다.

처음 몇년간은 ''포옹''이라는 미국식 인사법이 언어장벽을 보완시켜준 것 같다.

우리 가족에 대한 장모님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외손녀를 기르는데 도와주신 점이다.

한국여인의 전통적인 미덕을 가르쳐 주셨다.

그 중 온화함과 예술적인 민감성,다정다감한 사랑과 영적인 성격은 우리 딸이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장모님은 또 뉴욕에서 살 때나 워싱턴에서 살 때나 나이에 비해 왕성한 활동을 하셨다.

한국노인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셨다.

회장은 옛날에 태권도사범을 했다는 노인이 하셨는데,젓가락으로 날아 가는 파리를 잡는다는 자랑 덕분에 회장으로 뽑힌 게 아닌가 한다.

한국노인회 및 성당 활동외에 장모님을 늘 총명하게 유지시켜 준 것은 ''중매''였다.

장모님은 친구들의 손자·손녀들을 국제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중매를 취미로 했다.

넓은 의미로 볼때 장모님의 중매 목적은 주위 젊은이들이 사랑과 행복을 찾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의미있는 선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는 점은 장모님이 건강하시고 또 손주 14명에 증손주 18명인 문중의 ''최고 어른''이라는 점이다.

나는 늘 "장모님은 백살까지 사실 것"이라고 말씀드린다.

적어도 지금부터 몇년 뒤 우리 딸이 결혼할 때까지는 사셔야 한다고.

신앙을 갖고,사랑을 깊게 하고,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인생을 간단하게 사는 법 등 많은 것을 장모님으로부터 배웠다.

나는 항상 장모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장모님이 내 인생을 깊이 있게 해준 것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