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정 의견밖에 내 줄 수 없다"(공인회계사 K씨)

"뭐라고! 그러면 우리 은행이 망하고 국가경제도 흔들려!"(모 시중은행 임원)

시중은행의 한 사무실에서 공인회계사 K씨와 은행 임원간에 고성이 오갔다.

감사의견을 놓고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K씨는 은행측이 제시한 재무제표에 퇴직급여 충당금이 적게 계상된 것을 발견했다.

그만큼 손실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도 자그만치 자본금의 두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K씨로서는 ''부적정'' 의견을 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은행 결산담당 책임자는 펄쩍 뛰었다.

국가경제를 들먹거리며 열변을 토했다.

"시중은행이 부적정의견이면 외국에서 제공한 차관이 전부 회수되고 앞으로도 차관을 받지 못하게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국가경제까지 큰일 날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K씨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감사인으로서 소신과 책임이 강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은행 결산책임자는 ''돌려치기 묘안''을 생각해 냈다.

50장이 넘는 장황한 ''브리핑차트''를 만들어 정부당국자에게로 향했다.

부적정의견이 은행과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거의 반나절 동안 설명했다.

그는 이 당국자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정부는 곧 ''공인회계사 감사의견 표시에 대한 요령''을 시달했다.

퇴직급여충당금 대손충당금 등은 세법에 의해 처리된 경우 적정하게 처리한 것으로 본다는게 주요 내용이었다.

결국 K씨는 이 은행에 대한 감사의견을 ''적정''으로 낼 수밖에 없었다.

좀 오래되긴 했지만 회계사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K씨는 결국 ''관치(官治)회계''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소신있는 감사의견이 정부당국에 의해 좌절된 것이다.

IMF 전후에도 이같은 관치회계가 계속됐다.

A회계법인 임원은 "IMF 직후까지도 기업 기업회계기준에 비해 느슨한 은행감독원 결산지침에 따라 회계처리한 경우도 적정한 것으로 인정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업계 로비에 따라 정부의 회계관련 지침이 달라진 케이스는 수도 없이 많다.

S회계법인 관계자는 "환율이 변동할 때마다 이로 인한 기업의 손실이 크면 외화자산과 부채에 대한 평가방법 또는 손실반영 규모를 수시로 바꿔 왔던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환율변동이 재무제표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정부나 감독당국이 결산지침을 내리면 감사를 맡은 공인회계사의 역할이 줄어듭니다. 재무제표가 기준에 따라 적정하게 작성됐는지를 살피는 감사인이 당국의 방침을 거스를 수 없죠"(전 Y회계법인 공인회계사 C씨)

C씨의 말은 감독기관의 ''적당한 방조''도 회계사들의 부실감사에 한 몫 했다는 것이다.

정부나 감독당국이 업계의 사정을 봐주며 ''결산지침''이라는 형식으로 일정한 기준에 따른 공인회계사의 회계감사를 왜곡해 온 셈이다.

이렇게 되면 해외 투자자들은 해마다 결산지침을 바꾸는 국내 회계제도를 신뢰할 수 없어진다.

금융기관에 의한 ''금치(金治)회계''도 국내 회계업계에 뿌리박혀 있다.

금융기관에 대한 회계감사는 외국의 ''빅5''와 업무제휴를 하고 있는 국내 대형 회계법인이 한다.

감사인으로 선정되기 위한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구조가 생긴다.

공인회계사 J씨는 워크아웃 기업의 주채권은행이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아 회계감사나 실사에서 공평하고 객관적이지 못한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꼬집었다.

그 결과 소액주주나 다른 이해관계자가 피해를 볼 우려가 있다는게 J씨의 주장이다.

회계법인을 둘러싼 관치과 금치 관행은 수십년 동안 계속됐다.

IMF를 계기로 정부와 감독당국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회계기준''을 적용하겠다며 많은 부분을 개선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은 ''서로 좋은게 좋다''는 식의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았다"(한국회계연구원 관계자)는 것이 업계의 솔직한 이야기다.

오랜 관치가 회계법인들 사이에 깊이 뿌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번 대우계열사 분식회계사건을 계기로 회계법인이 관치와 금치를 벗어나 거듭나야 한다는 이야기다.

최명수.배근호 기자 m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