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홍상화

맥도날드 햄버거를 쌌던 기름종이를 구겨 던져버린 박인호의 행동은 진성호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 보였다.

진성호는 박인호의 그런 태도를 무시하고 모른 척했다.

마지못해 말로써 사표를 낸 상황에서 자신의 불만을 그런 식으로라도 표현할 수밖에 없는 박인호의 불편한 심기를 진성호는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글쎄,몇 년 전까지 모든 경제학자가 경제발전에는 ''아시아적 가치''가 필요하다며 유교사상을 찬양하더니,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미국식 시장경제의 신봉자이자 전문가가 되어 있더군요.

이현세 이사,어때요? 약육강식이 소위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세계화죠.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미국 같은 강한 나라야 좋겠지만…"

이현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쎄요.

저도 그 방면에 전문가는 아닙니다만,현재 세계화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도 많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촘스키(Noam Chomsky) 교수는 세계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통제되지 않는 세계화'',즉 ''국가정체성의 상실''에 반대하고 있지요"

"국가정체성의 상실은 어떻게 일어나는 거요?"

이현세의 답변에 박인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촘스키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세계화가 통제되지 않으면 선진 거대 자본이 대상국가의 통신과 금융 분야의 헤게모니를 잡는답니다.

두 분야만 잡으면 대상국가의 경제를 어느 정도 컨트롤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문화까지 점령하게 되지요"

"그것 보시오.우리 모두 그 사람 책을 꼭 읽어봅시다"

진성호는 박인호의 심정을 달래야 할 것 같았다.

이현세 이사보다 나이 많은 중역은 사표를 내자는 황무석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박인호를 비롯해 일단 사표를 내야 하는 사장단들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을 것이었다.

다른 사장들은 박인호와는 달리 침묵하고 있지만 그 속에 불만이 가득 차 있음을 진성호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자고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철학에 따라 발전해왔지요.

저희 그룹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성호는 주위를 둘러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은 저희 그룹의 버팀목입니다.

대의명분을 위해 몇 분은 잠시 현장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뒷전에 있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모두는 사무실,비서,차량 등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위기상황이 물러나면 돌아와야 할 분들입니다"

진성호가 강한 투로 말했다.

회의실 분위기는 다소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사장단 회의가 끝난 후 진성호는 회장실에 들어서자마자,비서를 통해 황무석 부사장에게 레인보우 클럽에서 즉시 만나자는 연락을 취했다.

회의 중 황무석이 낸 사표를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이현세 이사를 제외하고 모든 사장단을 다 내보내도 황무석만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지난번 주가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그가 앞장서 해결한 공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사내 비밀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그를 회사에 붙잡아둘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