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에 가보니...] 천년 신라인의 숨결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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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가봐야지" 하고 마음 먹은게 벌써 십수년이 지났다.
경주 남산 답사는 게으른 탓에 이제서야 이뤄졌다.
계기는 1일부터 시작된 경주문화엑스포였지만 엑스포와 경주 남산은 왠지 연관성이 없는 것 같다.
경주남산 답사는 사실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겨우 반나절의 짧은 시간으로 남산을 답사한다는건 언어도단이다.
그냥 산행일뿐이다.
남산을 제대로 보려면 1주일은 잡아야 한다.
다행히 동행한 김구석 남산연구소장이 불상들이 밀집된 코스로 안내했다.
그는 남산에 미친 사람이다.
경주 남산 자료를 하나씩 모으면서 남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작년에는 20년간 재직하던 직장(경주시청)을 그만두고 남산연구소를 차렸다.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www.kjnamsan.com)는 경주 남산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사이트다.
서남쪽인 삼불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첫번째 마주친 석불은 배리삼존불.
7세기께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적인 석불로 신라의 뛰어난 조각솜씨가 느껴진다.
얼굴과 몸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친다.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워있던 것을 1923년 일본인들이 현 위치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
망월사를 끼고 돌아 오솔길에 접어들자 비가 조금씩 뿌리기 시작한다.
길 바닥에 깔려 있는 밤과 살구가 정겹다.
삼릉계곡에 접어들자 석조여래좌상과 마애관음입상이 미소를 짓고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발견당시부터 머리 팔 다리가 잘려나간 불상이지만 옷주름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마애관음입상은 보조개까지 조각된 예쁜 얼굴이다.
신라인들은 바위에도 풀밭에도 부처가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남산에 불교 유물이 많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불상의 모습은 같은게 하나도 없다.
얼굴이 네모나고 볼엔 살이 많다.
인자한 이웃 아저씨 또는 할머니같은 인상이어서 오히려 정감을 느끼게 한다.
중턱에 있는 선각육존불에 다다르자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비를 입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비구름이 이제는 경주를 덮쳤다.
안내자는 비가 더위를 식히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
벽에 새긴 세밀한 선각기법이 마치 탱화(幀畵)를 보는듯 하다.
여래아미타불은 부처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습으로 극락세계를 조명하는 의미라고 한다.
상선암 못미쳐 만나는 선각여래좌상은 신라의 불상과 거리가 먼 느낌이다.
제작시기가 고려초로 추정돼 기법이 조악하다는 설명이다.
남산에서 두번째로 큰 불상인 마애여래대좌불도 선이 거칠고 억세게 조각됐다.
머리 뒷부분은 바위를 투박하게 쪼갠 흔적이 뚜렷하다.
불교 탄압시기에는 불상 조각이 쉽지 않았을게 틀림없다.
금오산에 올라 멀리 보이는 경주의 전원 풍경은 천년 신라의 역사에 무심한 모습이다.
김 소장은 이 곳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전해줬다.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에서 밤낮으로 놀다가 불시에 쳐들어온 견훤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견훤이 신라를 치러 온 때는 음력 11월로 포석정의 물이 얼어붙을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놀기에는 너무 추운 계절이라는 점이다.
경애왕이 아무리 놀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적이 코 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잔치를 벌였겠느냐는 설명이다.
그럴듯한 얘기다.
역사적 사실은 어쩌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을 수도 있다.
그의 주장은 뒷받침할 문헌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해 야사로 전해내려올 뿐이다.
경주 남산은 파괴로 점철된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유적지다.
조선시대 집권층은 남산에 있는 수천점의 불교 유물.유적들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지금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유물들이 몇 점 안될 정도로 당시의 파괴행위는 반(反)역사적이었다.
역사에 대한 인식부족은 현대에 와서도 다를 바 없다.
해방이후 정부가 한 일이라곤 77년에 탑 2개를 복원한게 전부다.
80년대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경주 남산에 대한 책 3권을 발간했을 뿐이다.
남산의 위대한 유물.유적을 정부마저 방치하는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들어 정부가 경주 남산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정부는 지난 98년에 남산 유물 발굴 복원사업에 5년간 65억원을 배정한데 이어 작년에는 기존 문헌에 대한 재조사작업을 시작했다.
올 초에는 탑 7개를 복원했다고 한다.
올해말에는 유네스코에서 경주 남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1천년이상 남산에서 살아숨쉬고 있는 수많은 불상들의 미소는 이처럼 몽매한 인간사를 마치 꿰뚫어 보는 듯해 하산하는 발길이 무겁기만 하다.
경주=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
경주 남산 답사는 게으른 탓에 이제서야 이뤄졌다.
계기는 1일부터 시작된 경주문화엑스포였지만 엑스포와 경주 남산은 왠지 연관성이 없는 것 같다.
경주남산 답사는 사실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겨우 반나절의 짧은 시간으로 남산을 답사한다는건 언어도단이다.
그냥 산행일뿐이다.
남산을 제대로 보려면 1주일은 잡아야 한다.
다행히 동행한 김구석 남산연구소장이 불상들이 밀집된 코스로 안내했다.
그는 남산에 미친 사람이다.
경주 남산 자료를 하나씩 모으면서 남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작년에는 20년간 재직하던 직장(경주시청)을 그만두고 남산연구소를 차렸다.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www.kjnamsan.com)는 경주 남산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사이트다.
서남쪽인 삼불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첫번째 마주친 석불은 배리삼존불.
7세기께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적인 석불로 신라의 뛰어난 조각솜씨가 느껴진다.
얼굴과 몸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친다.
남산 기슭에 흩어져 누워있던 것을 1923년 일본인들이 현 위치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
망월사를 끼고 돌아 오솔길에 접어들자 비가 조금씩 뿌리기 시작한다.
길 바닥에 깔려 있는 밤과 살구가 정겹다.
삼릉계곡에 접어들자 석조여래좌상과 마애관음입상이 미소를 짓고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발견당시부터 머리 팔 다리가 잘려나간 불상이지만 옷주름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마애관음입상은 보조개까지 조각된 예쁜 얼굴이다.
신라인들은 바위에도 풀밭에도 부처가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남산에 불교 유물이 많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불상의 모습은 같은게 하나도 없다.
얼굴이 네모나고 볼엔 살이 많다.
인자한 이웃 아저씨 또는 할머니같은 인상이어서 오히려 정감을 느끼게 한다.
중턱에 있는 선각육존불에 다다르자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비를 입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비구름이 이제는 경주를 덮쳤다.
안내자는 비가 더위를 식히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
벽에 새긴 세밀한 선각기법이 마치 탱화(幀畵)를 보는듯 하다.
여래아미타불은 부처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습으로 극락세계를 조명하는 의미라고 한다.
상선암 못미쳐 만나는 선각여래좌상은 신라의 불상과 거리가 먼 느낌이다.
제작시기가 고려초로 추정돼 기법이 조악하다는 설명이다.
남산에서 두번째로 큰 불상인 마애여래대좌불도 선이 거칠고 억세게 조각됐다.
머리 뒷부분은 바위를 투박하게 쪼갠 흔적이 뚜렷하다.
불교 탄압시기에는 불상 조각이 쉽지 않았을게 틀림없다.
금오산에 올라 멀리 보이는 경주의 전원 풍경은 천년 신라의 역사에 무심한 모습이다.
김 소장은 이 곳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전해줬다.
신라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에서 밤낮으로 놀다가 불시에 쳐들어온 견훤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견훤이 신라를 치러 온 때는 음력 11월로 포석정의 물이 얼어붙을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놀기에는 너무 추운 계절이라는 점이다.
경애왕이 아무리 놀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적이 코 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잔치를 벌였겠느냐는 설명이다.
그럴듯한 얘기다.
역사적 사실은 어쩌면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을 수도 있다.
그의 주장은 뒷받침할 문헌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해 야사로 전해내려올 뿐이다.
경주 남산은 파괴로 점철된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유적지다.
조선시대 집권층은 남산에 있는 수천점의 불교 유물.유적들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지금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유물들이 몇 점 안될 정도로 당시의 파괴행위는 반(反)역사적이었다.
역사에 대한 인식부족은 현대에 와서도 다를 바 없다.
해방이후 정부가 한 일이라곤 77년에 탑 2개를 복원한게 전부다.
80년대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경주 남산에 대한 책 3권을 발간했을 뿐이다.
남산의 위대한 유물.유적을 정부마저 방치하는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최근들어 정부가 경주 남산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고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정부는 지난 98년에 남산 유물 발굴 복원사업에 5년간 65억원을 배정한데 이어 작년에는 기존 문헌에 대한 재조사작업을 시작했다.
올 초에는 탑 7개를 복원했다고 한다.
올해말에는 유네스코에서 경주 남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1천년이상 남산에서 살아숨쉬고 있는 수많은 불상들의 미소는 이처럼 몽매한 인간사를 마치 꿰뚫어 보는 듯해 하산하는 발길이 무겁기만 하다.
경주=이성구 기자 s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