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계간 ''철학연구''에 ''스으라(Seurat)의 점묘화:김수영의 시에서 데카르트의 백색존재론''이란 논문이 발표됐다.

저자는 당시 연세대 강사였던 김상환씨.파리제4대학에서 데카르트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씨는 이 논문으로 그해 한국철학연구회가 수여하는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파리 유학시절 아내의 서가에서 김수영 시집을 발견했습니다.
프랑스에선 치밀한 원전해석을 중시합니다. 정밀한 독서가 습관이 될 수밖에 없지요. 한자 한자 뜯어서 읽은 뒤 산문집과 평론집까지 구해다 완전히 독파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김수영과 연애를 한거죠"

김씨는 이후 현대시사에서 가장 난해한 시인으로 꼽히는 김수영에 관한 논문을 잇달아 내놓았다.

''김수영과 책의 죽음'' ''모더니즘 혹은 사유의 금욕주의'' ''김수영과 한국시의 미래''….

문학잡지에 발표된 논문은 김씨가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자리잡은 지 5년 만에 한권의 책으로 나왔다.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민음사).

제목은 유명한 김수영의 시 ''누이야/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우스운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우스워하지 않고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의 정신사는 단절의 연속입니다. 역사를 반성하고 미래를 예측하려 할 때 신뢰할 만한 선배를 찾기 힘듭니다. 김수영은 그런 점에서 젊은 세대에게 소중한 자산이죠.저는 김수영을 통해서 한국 현대사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상환 교수는 "김수영의 시에는 황무지를 견디게 하는 반성,초월론적인 성찰이 담겨있다"며 "김수영의 위대성은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사유를 형이상학적 차원의 역사론으로 끌고 간 데 있다"고 주장했다.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으로,금욕주의를 금욕주의로 극복해가는 모습엔 깡패같은 일면도 있고 광기의 압력도 느껴진다는 분석.

개인으로서 김수영은 강인한 사색인이었으나 후진국 시인으로서 온갖 모순을 혼자 껴안아야 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아픈 몸이/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나의 발은 절망의 소리/…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온갖 적들과 함께/적들의 적들과 함께/무한한 연습과 함께''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