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 < 경희대 경영학 교수 / 경영대학원장 >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고 러시아에 시장경제바람이 불어닥칠 무렵인 1990년대 초 필자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러시아회계제도 연구를 위해서였다.

그때 모스크바에는 이미 미국의 8대 회계법인이 모두 지사를 두고 러시아경제를 분석하고 있었다.

회계가 기업체와 투자자 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고 또 외부 이해관계자들의 의사결정을 위한 기초며 회계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 투자자나 채권자라는 기본적 사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할 때였다.

우리 나라에도 모든 대학에 회계학과나 회계학전공이 생겨 연간 1만5천명이 응시할 정도로 공인회계사시험의 인기가 높아졌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선 아직 ''회계''를 돈이나 세는 것쯤으로 인식하거나,고작 복식부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모스크바시절이 생각났다.

얼마전 지방행정연구원 주최 공청회가 있었다.

65조원에 달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집행이 현금출납부를 기록하는 수준인 단식부기로 처리되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 회계에 복식부기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공청회였다.

물론 이보다 엄청나게 규모가 큰 중앙정부의 회계도 지방보다 나을 게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21세기 지식강국 대열에 합류하려는 국가적 노력과 동떨어진 우리 회계의 현 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안이었다.

미국에는 현재 30여만명의 공인회계사가 있다.

매년 두차례 치르는 CPA시험에 10만명이 응시,1만명의 합격자를 낸다.

회계정보는 기업의 실상을 정확히 반영한다.

때문에 주가변동이나 기업 자금흐름을 유도하는 실질적 힘을 갖고 있어 공개된 재무제표는 시장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온다.

회계자료의 정확성은 외부감사제도에 의해서 검증된다.

상장기업을 비롯한 대규모 조직은 모두 ''빅5''라 불리는 국제화된 대형회계법인에 의해 감사된다.

이들의 감사의견은 신뢰성을 갖고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이들 회계법인은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 사무소를 두고 미국자본·기업의 해외진출 첨병 역할을 한다.

과거 미개발지역에 진출하기 위해서 먼저 지리학자와 선교사들이 파견되고 이어 군대가 진주했다면,오늘날은 회계사와 변호사가 먼저 들어가 업계 현황을 분석한 후 금융자본이 따라가는 패턴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외부감사 제도를 비롯한 선진 회계제도가 도입된지 30년이 넘었다.

1천5백개 정도의 거래소·코스닥 상장기업에 6천명의 회계사가 활동한다.

경제의 글로벌화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우리 국적의 기업과 자본이 속속 해외로 진출한다.

국내시장 또한 세계자본과 일류기업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와는 걸맞지 않게 회계산업은 오히려 뒷걸음질치고,회계감사 결과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나날이 추락하는 것 같다.

기아그룹 감사인이었던 청운회계법인이 퇴출되고 또 대우의 감사인이었던 산동회계법인은 1년 영업정지 조치가 내려졌다.

기업의 부실문제가 터질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메뉴가 ''감사인 문책''이 돼버린 듯하다.

그러나 이래서는 안된다.

회계는 기업활동의 진실한 내막을 외부인들에게 알리는 메신저이며 왜곡된 기업지배구조상의 문제점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다.

회계산업은 정보화시대의 국경 없는 대표적 지식산업이고,우리나라의 지식서비스산업 중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춘 유망한 산업분야다.

이 시장이 제기능을 찾는 것이야말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여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제일 뿐만 아니라 자본시장에서 투자자와 채권자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또한 회계산업의 발전은 기업뿐만 아니라 문화예술활동의 활성화와 NGO 등 사회단체활동의 내실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21세기 문화산업시대에 있어 새로운 지식강국의 바탕을 다지기 위해 회계산업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적극 육성할 것을 정책당국에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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