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시장이 또 얼어붙고 있다고 한다.

수백개 기업을 상대로 퇴출 여부에 대한 심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우리는 사실상 모든 기업을 상대로 퇴출여부를 점검한다는 이 기묘한 발상이 어떤 연유로 제기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자금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현상을 보자면 이러다간 쪽박까지 깨버리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금융당국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심사대상에 올라있는 기업이 여신규모 5백억원 이상만 따져도 법정관리기업과 화의 기업을 포함해 7백30개사에 달하고 은행별로는 여신액이 5백억원을 밑도는 중견기업들까지 심사대상에 올려놓고 있다니 자금시장에 핍박현상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기업신용을 점검하는 작업은 금융기관들의 일상 활동 그 자체라고 하겠거니와 이런 일을 군사작전하듯이 일정을 정해 한꺼번에 몰아치고 있으니 사극에서나 등장함직한 살생부(殺生簿)라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도는 형국이다.

이러고도 금융시장이 안정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결국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는 사겠다는 투자자가 없어 연일 가격이 폭락하는 중이고 시중자금은 국고채 같은 신용위험이 전혀 없는 채권에만 집중되는 등 자금 편중현상이 더욱 심화된다는 보도다.

재벌 그룹에 속한 대기업이 사채업자들에까지 손을 벌리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고 중견기업들과 벤처기업들도 직간접으로 퇴출 열풍의 영향권에 들면서 자금난을 겪고있기는 마찬가지라 한다.

가만히 두어도 자금흐름이 순조롭지 않은 마당에 전 금융기관이 대출심사와 살생부 작성에 내몰리고 있는 까닭에 금융시장의 흙탕물은 언제쯤 맑아질지 예측조차 하기 어렵다.

기업대출은 또 그렇다 하더라도 연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가 아직 15조원이나 남아있고 내년에 다시 60조원이 만기를 맞는 상황에서 어떤 비장의 수습책으로 자금난을 다스릴지 궁금하다.

정부는 기업 생존여부를 일제 점검하는 것과 동시에 채권펀드를 10조원 추가 조성하고 연기금의 증권투자를 유도하는등 다양한 자금 공급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혔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로는 정부대책에 아랑곳없는 시장혼란만 부각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기업구조조정 작업을 조속히 마무리하는 외엔 다른 뚜렷한 방법도 없을 것이다.

금융기관들은 거래기업에 대해 이미 충분한 사전정보를 갖고 있을 진대 이눈치 저눈치 보면서 머뭇거릴 것이 아니라 조속히 결론을 내주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