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들은 우리의 원초적 문화유산의 하나다.

중국 동북부에서도 ''캉(坑)''이라는 구들의 바닥난방법과 뿌리를 같이하는 방법을 쓴다지만 그것은 부분 난방일 뿐이다.

로마시대에 목욕탕의 바닥을 데우는데 쓰였던 ''하이퍼코스트''라는 것이 있었어도 구들보다 훨씬 뒤의 일이고 그나마 로마의 멸망과 함께 맥이 끊겨버렸다.

구들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설치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학계일부에서는 함북 웅기지방의 청동기시대 움집터에서 발견된 구들의 예를 들기도 하지만 아직은 불확실하다.

우리 구들문화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10세기초에 편찬된 ''구당서''의 고구려편이다.

여기에는 "겨울철에 모두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한다"고 적혀있다.

백제인들은 다락집에 살고 있다는 ''구당서''의 기록이나 신라에서는 음식조리에 숯을 많이 썼다는 우리 사서의 기록으로 미루어 백제나 신라에는 구들이 없었다가 통일신라때부터 점차 퍼져나가 고려시대에 와서야 전국적으로 구들이 생겼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12~13세기를 전면적 구들문화 정착기로 잡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에는 조선시대인 15세기말까지 구들이 전혀 없었고 17세기후반에도 민가에는 구들이 없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사적 제128호인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檜巖寺址)에서 국내 최대의 온돌이 발굴됐다.

고려 충숙왕때인 1328년 지공(指空)이 창건하고 1378년 나옹(懶翁)이 중창한 이 절은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으로,경내가 1만여평,승려가 3천여명에 이르렀던 대찰이다.

왕위에서 물러난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정면 31.6?,측면 14.1?의 이 대형 건물터는 승방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효공왕때 담공선사가 지었다고 전하는 경남 하동의 칠불암 아자방(亞字房)의 온돌유구가 거듭된 화재로 훼손된 것과는 달리 처음 발굴된 완벽한 유적이다.

고건축학계는 구들연구의 획기적 자료를 얻은 셈이고 온수보일러를 구들처럼 알고 지내는 청소년들에게는 이보다 확실한 교육자료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