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승려인 라마가 7백여년전 고려때 우리나라에 왔었다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고려인 출신의 라마가 있었다면 더 이상스럽게 여길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것은 ''고려사''에 기록돼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티베트인 라마 4명은 원종때인 1271년 처음 우리나라에 왔고 흘절사팔 육자양 강화상 등 고려인 라마가 ''고려사''에 등장한다.

흘절사팔은 진도(珍島) 출신으로 몽고군이 삼별초를 토벌할 때 포로로 원에 잡혀가 라마승이 됐다고 적혀 있다.

그는 충렬왕(1296)때 라마승을 보호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가지고 귀국했다.

충선왕과 왕비인 소국대장공주는 원에서 19명의 라마승을 초청해다 계를 받았다.

고려는 원의 강요에 못이겨 원종말부터 공민왕 중기에 걸친 80여년동안 공식 비공식적으로 라마교와의 접촉을 이어갔다.

그래도 고려 불교가 라마교의 영향을 크게 받지않고 왕실의 의례용으로만 쓰인 것만큼 다행스런 일은 없다.

그러나 공주 마곡사에 있는 풍마동 5층석탑이 전형적인 라마교 양식이고 고려불상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도 국내 사찰에서 영험이 있다고 외우는 ''옴마니 파드메 홈''이라는 주문도 라마교의 영향이란 설도 있으나 불확실하다.

라마교는 티베트에서 7세기전반 인도·중국불교와 토착종교인 본(Bon)교가 융합된 밀교색이 짙은 종교다.

13세기 중엽부터 칭기즈칸의 비호를 받아 원의 국교처럼 된 뒤 티베트의 정치 종교 양권을 장악했다.

원의 광적인 라마교 숭배는 티베트 불교를 완전히 타락시켰고 원이 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4세기 후반 총카파는 이처럼 부패한 라마교를 개혁해 ''황색교단''을 만들었다.

그가 창안한 것이 ''달라이라마는 계승자에게 환생(還生)돼 나타난다''는 교리이고 그가 제1대 달라이라마다.

그를 이어받은 제14대 달라이라마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노벨평화상 수상자다.

한국불교계의 초청을 받은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중국이 반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옛 인연만을 생각하면 그럴 이유도 없을듯 한데….우리 정부의 결정이 관심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