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원용 <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 wykwon@sdi.re.kr >

지난 1960년대 이래 우리 사회는 두 눈을 안대로 가린채 앞만 보고 뛰는 경주마처럼 살아왔다.

''GNP신앙''에 몰입하여 압축된 근대화ㆍ도시화 과정을 이룩했으나,이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부분도 적지 않다.

서울에서는 19세기말 개항기 이후부터 지어진 근대건축물이 정당한 평가나 시민들의 관심조차 없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신문에 보도된 뒤에야 소동이 난 국도극장의 사례가 바로 그러하다.

중년이상에게는 추억이 깃들인 대한극장도 멸실되어 옛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유서깊은 화신백화점은 종로타워로 바뀌었다.

이제 서울의 옛 강북 분위기를 어디에선가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어느 미국 교포 한 분은 산불이 나서 졸지에 집을 태우자,그 황망중에도 흑백사진 앨범만은 지니고 뛰어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영원히 복원할 수 없는 가족역사에 대한 애착이다.

지난 1백년간 서울 20세기 변화모습을 담은 사진 기록집을 보면,근대건축물이나 구조물이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물''이라는 단순 인식만으로 도시개발 와중에서 맥없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과거는 흘러간 현재의 무덤이 아니라 미래와 후손을 위해 살아있는 시공간(時空間)이다.

''글로벌''시대가 될수록 역사의 향기나 뿌리가 없는 도시는 존립기반이 취약하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문화재 보호정책은 근대건축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을 뿐더러 박제된 역사문화재를 보수ㆍ관리하는데 급급하다.

이제 근대건축물도 ''역사적 자산''으로 취급되어야 하고 그 매력과 중요성에도 눈뜰 때다.

초현대식 고층건물 못지 않게 도시 이미지를 개성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기억''은 역사적 건조물에 의해 되살려진다고 볼진대,가회동의 한옥보존도 같은 차원에서 귀중한 서울의 역사문화자원이다.

그러나 근대건축물의 보전에는 역사경관과 일상생활을 연계시켜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의 유연성이 요구된다.

근대사의 맥락속에서 특별한 장소성과 의미를 지닌다면 모두 등록ㆍ조사해 복원 보존 재활용 가치를 따져 보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건물의 외관만 살리도록 지원하고 기능적인 ''리모델링''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외국도시에서는 공장 철도역 발전소 등이 미술관이나 과학관으로 훌륭하게 탈바꿈하고 있다.

과거와 대화가 없는 도시는 미래도 없다.

''시민 트러스트(신탁운동)''라도 추진하고 근대건축물의 보전조례와 활용 프로그램이 조속히 만들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