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형 < 서울대 교수 / 공법학 >

벌써 15년전쯤의 일이다.

대출을 받을 요량으로 1백만원짜리 적금을 들고 3분의1을 불입했다.

은행직원의 철석같은 약속이 있었기에 믿고 기다렸다.

그러나 막상 돈이 필요할 때 대출은 거부됐다.

당시 군출신인 지점장이 부임하여 갑자기 일반대출을 중지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직원은 어두운 표정으로 몸둘 바를 몰라했다.

말없이 해약을 했다.

그 은행은 그 후 몇년 안가 부도위기에 빠지고 결국 흡수합병의 운명을 맞았다.

흔히 우리는 금융기관의 후진성을 이야기한다.

금융기관 구조조정이 진행중인 가운데 불법대출문제가 터지고,은행들마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등을 맞추기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니 수긍할만도 하다.

그러나 몇달 전 폴란드 여행에선 이와는 사뭇 다른 교훈을 얻었다.

국내 어느 대기업이 현지 금융기관을 인수해 설립한 한 은행은 사장 이하 한국인 임원 네명의 고군분투로 96년 은행인수 후 불과 3년여만에 최우량 중견은행의 자리를 확보했다.

그 은행의 박동창 사장은 말한다.

성공의 비결은 구 공산정권의 노멘클라투라가 몰락하는 바람에 갑자기 불안할 정도로 젊어진 정부가 금융제도의 투명성,예측가능성과 페어플레이 환경을 보장해 주었던 데 있었다고.

그의 체험담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 금융기관의 문제는 경영이나 금융기법의 후진성이 아니라 제도환경이 발전을 가로막은데 있었다는 그의 말은 그 어떤 장황한 금융이론도 전해주지 못하는 분명한 진리를 웅변해 주었다.

그런데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폴란드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들이 그런 소중한,돈으로도 살 수 없는 무형적 자산을 형성했다는 것,이 사실이야말로 그 입지전의 가장 큰 교훈이었다.

만일 그 은행을 인수한 대기업이 목표수익률을 달성했다고 판단해 투자를 회수한다면 애써 축적한 무형적 자산을 제 가치도 못 받고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폴란드에서 신출내기 외국계 금융기관의 경영혁신을 가능케 했던 공정하고 투명한 제도적 환경이 없다면 BIS비율이 호전돼도 우리 금융기관의 장래는 어둡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두해 전만 해도 폴란드에서 대우의 티코는 대인기였다.

한때 시장점유율 1위를 누리던 대우 현지법인은 그러나 대우사태의 여파로 중요한 시장거점들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달 전 대우차에 대한 폴란드 사람들의 평가는 여전히 높았다.

고속도로에서는 심심찮게 티코와 누비라를 만날 수 있었다.

최근 미국 포드사의 대우차 인수포기로 상황이 더욱 악화됐으리라고 생각되지만,더 큰 걱정은 분할매각방침이나 GM 인수문제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우차가 천신만고 폴란드에 구축해 놓은 신뢰의 무형적 자산을 유럽전진기지와 시장에서의 거점과 함께 바겐세일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폴란드에서의 대우차는 단순히 외국회사의 현지법인 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국경제 그 자체의 상징이고 그 도전과 노고가 가시화된 물증이기도 하다.

만일 다른 자동차회사가 그 같은 신뢰의 거점을 구축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야 할까.

물론 구조조정이 신속하고 예측가능한 방식으로 추진돼야 한다는데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형적 자산의 가치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제 값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무형적 자산 가치를 가시화할 수 있는 연구조사와 이것을 거래관계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기법을 개발해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즉물적인 유형문명만 바라보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뒤늦게나마 무형적 자산의 가치를 깨달아야 할 때가 됐다.

이제는 좀 숨을 고르고 냉정해지자.우리가 가진 무형적 자산은 어떤 것이 있고,그 하나 하나의 가치는 얼마나 귀한가.

구미의 기업이라면 응당 요구했을 보이지 않는 자산을 우리도 미리 미리 챙겨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