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나 발길질로 사람을 죽인 다음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시체는 대부분 입과 눈이 벌어지고 손은 펴 있고 상투는 흐트러지고 몸에는 치명적인 상처가 있다.인후 아래에 목맨 흔적은 있으나 피멍의 검은 자국은 없을 것이다.혀는 나오지 않으며 상하의 이빨이 서로 닿지 않고 목맨 흔적이 피부에는 깊이 들어갔으나 파랗고 붉은 빛이 없으며 흰테두리만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살인사건의 사체 조사 지침서인 ''신주무원록''의 한 대목이다.

조선시대에도 현대와 마찬가지로 살인사건이 발생할 경우 살해방법을 추정하는 데 과학적 원리를 이용했다.

당시의 사체 검시가 현대 의학에서 활용하는 해부학적 방법이 아니라 신체의 외상을 주로 조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과학적 조사방법이 활용됐다.

예를들어 독살의 혐의가 있는 경우 은비녀를 인후부에 집어넣어 색의 변화를 살펴보거나 밥 알을 시체의 입안에 가득 넣어두었다가 한참 후에 꺼내 닭에 먹여 사망하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검시를 할 경우에는 술지게미 등 초(醋) 성분으로 사체를 깨끗이 닦아냈다.

또 사체의 상흔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경우 감초 달인 물로 닦아내면 흔적이 잘 나타난다는 경험적 사실을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사건 관련자들을 심문하여 응답을 기록하고 시체는 사건 발생 지역에 그대로 두고 검시하여 사인분석에 참고했다.

특히 살인의 실제 원인 즉,칼에 찔려 죽은 것인지 독살인지 아니면 구타 등에 의한 사망인지 구별하는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피살체의 보존과 조사 방법이 매우 중시됐다.

또 시체가 부패하기 쉬운 여름철에는 빠른 조사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사건 접수 당일 출동하도록 법으로 규정했으며 불가피하게 검시를 행할 수 없을 때에는 인근 지역의 군수로 하여금 대신케 하는 등 보조 수단을 강구하였다.

혹 사건을 담당할 해당 군수 등이 사건 관련자와 친·인척 관계에 있을 경우에는 검시 및 사건 조사를 행할 수 없도록 하기도 했다.

이밖에 살인사건의 현장에는 반드시 두 명의 조사관이 출동하여 조사하고 양자의 결론이 일치할 때만 사건을 종결하였을 뿐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세 번,네 번 등 다수의 조사를 각기 다른 검시관이 행하였다.

그렇게 해서도 확정적인 결론이 나지 않으면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조사관의 자질과 수사 과정을 심문했다.

조사방법 못지않게 법 집행 역시 과학적이었다.

김호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