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이 바라보던 벽에 지쳐/불과 시계를 나란히 죽이고/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꺼져드는 어둠속 반딧불처럼 가물거려/정지한 <나>의/<나>의 설움은 벙어리처럼…/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벽 차고 나가 목메어 울리라! 벙어리처럼,/오-벽아''

한국의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1936년 신춘문예 당선작인 ''벽''이다.

암울한 시대상황 아래 방황하던 스물한살 청년의 고통을 이렇게 털어놓은 미당의 시에 대한 열정은 83년의 시전집 자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늙었으니 그만 덮어두자든가 그런 작정도 전혀 하지 않는다.

숨이 내게서 넘어가는 그때까지 나는 인생의 간절한 것들을 늘 추구하고 또 추구할 것이다''

미당은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신문기자와 대학교수등을 지냈다.

41년 첫시집 ''화사집''을 낸 뒤 ''귀촉도'' ''동천'' ''질마재신화'' ''떠돌이의 시'' ''팔할이 바람'' ''산시(山詩)''등 모두 14권의 시집을 펴냈다.

''자화상''을 비롯한 초기작에서 원죄의 형벌을 노래한 시인은 이후 도교와 불교,민화와 설화,역사와 사상을 아울렀다.

아무도 흉내낼수 없는 독특한 어법과 질박한 사투리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설화는 물론, 어떤 소재라도 시로 만들어냈다.

현실인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대해 자신은 ''부족함을 곧이곧대로 인정하면서 의(義)나 리(理)에 굳어버리지 않고 항상 바람처럼 물처럼 떠돌고픈 시인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생각은 그의 고향인 전북 고창 질마재마을 선운사 앞에 세워진 시비의 문구인 ''누런 황소같이 미련한 문학청년의 길 참 한정이 없구나''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91년 전집을 내면서도 ''늙었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고 그저 한 문학청년이라는 생각뿐이고 또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기만 하므로 불가불 공부를 아조 많이 더해야만 하겠기에 다시 한 학생의 신분으로만 돌아가서 살려고 한다''던 미당이 병석에 누웠다.

칠십년 가까이 시인 노릇을 하느라 심장이 쪼글쪼글하게 말랐다는 노시인의 쾌유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