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개 정리대상기업 명단이 발표됐다.

검토를 거듭했지만 이들은 앞으로 부실이 더 늘어나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기업들이었다.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면 보다 빨리 정리됐어야 했는데 막대한 손실을 꺼린 은행들이 미뤄온 까닭에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도 생각된다.

은행은 ''주식회사''로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경영이 정상화되어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다면 자금을 계속 지원해야 하고,그렇지 않다면 추가적인 부실을 막기 위해 여신을 중단해야 한다.

정리대상 기업의 판정은 금융기관 고유의 영역이고,또 금융기관이 거래기업의 신용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감독당국은 금융기관이 위험관리를 제대로 해서 건전하게 경영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책임이 있다.

금융감독원이 부실기업의 판정기준을 제시했는데 이 기준이 새로울 건 없으며,은행마다 갖고 있는 여신심사 기준을 감독당국의 자격으로 예외없이 지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심사과정에 있어서도 구체적 판단은 은행이 하되 금감원은 일관되게 원칙의 준수를 촉구했다.

항간에는 현대건설이나 쌍용양회에 대해 특혜를 준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는데,신규자금의 지원중지 자체가 치명적인 제재이며,유동성문제에 봉착되면 즉시 법정관리를 요청할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조건부 법정관리라고 할 수 있는데,이제 이들 기업의 향방은 자체적인 자구노력의 강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은 그로 인한 경제·사회적 충격이 크다 할지라도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 상반기까지 10%이상의 성장세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하반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우리를 둘러싼 국제경제 여건이 크게 불리해지고,이에 따라 국내경제의 성장률도 둔화되는 조짐이 나타남에 따라,시기를 놓치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이 커질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우선 한국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을 비롯한 EU 등 선진국의 경기가 후퇴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고유가와 반도체 가격 하락 등으로 인해 교역조건이 악화됐다.

여기에 더해 지난번 위기의 발원지였던 동남아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인도네시아의 루피아화와 필리핀의 페소화가 30%이상 평가 절하됐고,태국 바트화의 가치는 20% 떨어졌다.

다행히 한국은 구조조정을 통해 괄목할 만한 경제회복을 이루는 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올들어 8월말까지 1백10억달러 이상의 해외자금이 국내증시에 유입됐다.

하지만 9월 이후 외국인들이 10억달러의 주식을 순매도함으로써 경고등이 켜졌다.

이들은 한국이 대내외적으로 발표한 바대로 원칙에 의거하여 구조조정을 강도 높게 추진할 것인지를 예의 주시하면서 한편으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 정리대상기업의 종사자들에게는 뭐라고 할 말 없지만,지금 당장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으면 더 큰 불행이 초래된다는 판단이 섰기에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회생가능성이 없는 기업을 분리하여 옥석을 구분하지 않으면 모두가 공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과제는 ''이제부터 어떻게 대응하느냐''다.

적잖은 대기업이 일시에 퇴출되기 때문에 협력업체의 연쇄부도 등 파장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범정부 차원에서 ''기업구조조정 지원단''을 발족해 비상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금감원은 물론 재정경제부 건설교통부 노동부 한국은행 등이 자금시장 상황과 기업의 애로사항을 면밀히 점검해 필요한 지원방안을 신속하게 시행할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이 이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산업구조가 바뀌고 기술혁신이 진전되면서 ''창조적 파괴''는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원칙이 바로 서고,시장참여자가 그 원칙을 수긍하고 그 원칙에 따라 행동할 때 한국경제의 앞날은 밝아질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