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태국에서 시작된 아시아 환란이 한국까지 전염되었을 때 소위 외환시장의 교란을 설명하는 이론엔 두 가지가 있었다.

재정적자로 설명이 시작되는 ''제1세대 모형'',그리고 장래에 대한 예상이 변할 때에 환란으로 이어지는 거시경제 균형점의 이동이 ''제2세대 모형''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환란은 이 두 모형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몇가지 특징을 보였다.

과도한 기업과 금융기관의 도산,금융시스템의 취약성,그리고 소위 아시아적인 가치(Asian Value)가 그것이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 소위 ''제3세대 금융모형''이다.

이 모형에 따르면 환란은 한갓 자산가치 붕괴의 조짐에 불과하며,아시아 경제위기는 본질적으로 경제의 거품현상이 꺼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품이 생기는 경제에 내재한 시스템이 바로 정실자본주의,연고대출, 부정부패, 금융시스템의 정보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이고 그것이 아시아 가치의 부정적인 면이라는 것이다.

아시아 가치는 법과 제도,그리고 상(商)관행이 미비한 유교국가에서 자본주의적 압축성장을 일궈낸 국가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긍정적 면을 같이 갖고 있다.

아시아 가치가 성장을 가져온 반면,그 부정적 측면이 환란을 초래했다는 설명이다.

이 이론이 맞다면 한국의 환란은 그 원인이 정경 유착과 금융시스템의 하자(瑕疵)라 할 수 있으며,거품이 꺼지면서 돈드는 정치와 이를 뒷받침해온 은행의 연고대출이 도마에 오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00년 11월3일 서울 명동에 있는 은행연합회관에 십수명의 은행장이 모여 52개의 기업에 대해 2차 구조조정이라는 신용평가 결과를 발표한 것은 아시아적 가치가 시련을 겪고 있는 어려운 역사적 현장을 보여준 것이다.

이때 가장 두드러진 결론은 현대건설에 대해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부도''를 유예해 준 것이다.

그 동안 정부 당국자는 현대 일가를 찾아다니며 이 역사적 현실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채 만기 도래분과 협력업체에서 돌리는 진성어음,그리고 해외채무 원리금이 돌아올 때마다 부족한 자금을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이 관례대로 ''대출''해주고 있었다.

때문에 이 대출을 ''갑자기'' 못하겠다고 전달하는 것은 은행의 담당대리나 은행장으로서는 버거운 일이었다.

''갑자기'' 못해 준다는 것을,대기업 회장을 찾아가 설명해야 하는 이 현실은 ''정실 자본주의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입장으로서는 현대건설은 좋은 회사다.

금년에는 수주 실적이 신통치 않지만,연간 1백여억달러 규모의 해외건설을 수주하는 ''이익이 나는 회사''다.

다만 부채 5조원 규모가 문제라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이 부채를 줄이고 몸집을 줄여서 좋은 회사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자구노력''을 강도 높게 요구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결국 현대라는 대기업은 한국적 상황에서 대북사업도 통 크게 하고 또 해외건설에서 신인도를 높였으며,정치자금도 대면서 한반도를 경영하는 대기업다운 운신을 해왔다.

만일 현대건설이 실패하여 법정관리로 넘어가면,현대는 경영권을 잃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해외 신인도를 잃어 해외건설 사업을 잃게 되고,진행중인 사업도 건설 현장의 사정상 갑자기 적자사업으로 돌변하게 될 것이다.

사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관 협력업체의 연쇄적인 어려움도 따를 것이다.

결국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고 대북사업의 길을 튼 현대를 ''주식회사 한국''이 버려야 하는 아픔이 있을 것이다.

정부는 현대건설에 대해 법정관리는 피할 수 있는 감자와 출자전환 방안을 내놓았다.

경영권은 빼앗되 파장을 최소화하고,은행도 살리자는 방식이다.

그리고 또 한번 정씨 일가에게 현대건설을 살리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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