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천에 수묵채색,110X91.5㎝)은 고암 이응로(李應魯·1904~1989) 화백이 1978년에 파리에서 그린 그림이다.

한글 서체를 변형시킨 문자화(文字畵)로 간결하고 단순한 형태다.

이 그림을 잘 들여다 보면 작가의 마음 속에 감춰진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화면 위쪽에서 사람의 어떤 자세를 연상케 하는 것이 바로 작가의 의도다.

어떻게 보면 만세를 부르는 것 같고,춤을 추는 것도 같다.

또 달리 보면 벌을 서기 위해 손을 든 모습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작가가 꼭 어떤 형상을 생각해 그린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작가가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상상의 나래''다.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다는 뜻이다.

그걸 확인하려면 그림을 거꾸로 보고 어떤 느낌을 받는가 실험해 보면 알 것이다.

해답은 "당신 마음대로 생각해"가 아닐까.

문자가 갖는 특별한 이미지를 추출해 내거나 혹은 그 변형을 통해서 특별한 느낌을 연출해 내는 효과를 노린 것 같다.

상형문자 자체가 그림에서 나온 것이므로 글자와 그림은 한 뿌리에서 돋아난 싹과 같다.

문자화 작업은 우리나라 작가들뿐 아니라 외국 작가들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일이다.

폴 클레가 1938년에 제작한 ''프리제''는 이집트 벽화에 있는 상형문자와 비슷하다.

한국 작가들 중에서는 이응로 남관 김기창 화백이 문자화에 관심을 가지고 열성적인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누가 먼저냐로 다툰 것이다.

고암은 1973년 동아일보 문화면 시론에 ''창작과 모방''을 발표(3월2일자),남관을 겨냥해 논쟁을 벌였다.

''창작과 모방''론을 폈지만 속살은 고암이 남관보다 먼저(1960년대부터) 문자화 작업을 했다는 내비침이었다.

남관은 이같은 일이 있은 지 한달열이틀 만인 4월14일자 동아일보 같은면에 고암을 반박하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남관은 문자를 화면 구성에 이용한 것은 2차대전부터라고 꼬집었다.

또한 브라크,폴 클레,피카소,그로츠,슈비테르 등 많은 화가들이 글자를 이용해서 추상적인 작품을 제작했다고 공격했다.

누가 먼저였건 이 두 화가의 문자화 작업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고암이 일본 남화의 대가 마쓰바야시 게이케쓰에게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그의 집 대문에서 현관까지 자신이 그린 그림을 깔아놓고 마쓰바야시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금상을 탔다고 화우들과 밤새 술을 마시고 명동 거리를 누비던 그가 이른바 ''동백림(東伯林)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것과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남아있다.

때마침 이응로 화백의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한 ''이응노 미술관''이 서울평창동에 건립돼 14일부터 개관 기념전을 갖는다.

월간 Art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