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껍질을 볕이 잘 드는 마당에 넌다.

한동안 구더기가 끓고 나면 비리한 냄새가 가신다.

더러운 더께들은 3년 동안 햇볕에 닳고 바람에 날린다.

바짝 마른 껍질을 갈아 물에 담근다.

잘게 쪼개진 몸뚱이는 깊숙이 스며있던 불순물까지 다 토해낸다.

1년쯤 지나 깨끗해진 알갱이를 건져 곱게 빻은 후 가마솥에 볶는다.

남은 것은 눈부신 백색의 순결한 가루.

바로 불변의 미술재료인 호분(조개가루)이다.

조개가루는 질감이나 결이 모래육질과 유사하지만 효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돌가루보다 성근 조직은 흡수력이 탁월하다.

색은 거침없이 먹혀들고 매혹적으로 번진다.

무게가 가벼워 캔버스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 것도 장점.

국내에서 조개가루를 제일 먼저 회화에 도입하고 활용한 사람이 ''미술계의 퓨전작가''로 이름난 한국화가 한풍렬(58·경희대 교수)씨다.

학부에서 서양화,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한씨는 한국화의 장르적 지평을 넓히겠다는 일념으로 한국화에 서양화의 특성을 접목시키는 데 주력해왔다.

다양한 재료와 조형미를 실험하던 그는 80년대 후반 변하지 않는 자연재료인 조개가루에 관심을 뒀다.

손수 가락시장에서 조개껍질을 모아다 조개가루를 만들어 작품에 썼다.

98년에는 당시 그렸던 작품들에 10년 만에 서명을 했다.

"재료의 내구성을 검증하는 것은 작가의 의무"라는 설명이다.

서울 관훈동 선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한씨의 10번째 개인전에서는 조개가루가 빚어내는 묘미를 눈으로 볼 수 있다.

97년에 이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그린 풍경화 30여점(4∼10호)을 전시한다.

안개 자욱한 부다페스트,노을진 프라하,활기 넘치는 뉴욕 뒷골목….

조개가루가 발린 캔버스위에 고풍스러운 도시의 정경이 수묵과 담채로 얹힌다.

이국적 느낌이 물씬한 작품들 틈에는 낯익은 서울풍경도 몇점 들어있다.

물에 젖은듯 차분한 회색을 주조로 특유의 잔잔하고 포근한 색감이 더해져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90년대 중반 추상에서 구상으로 방향을 튼 그는 작품보다 말이 앞서는 ''가짜 추상''에 대한 날선 비판도 잊지 않는다.

"추상을 빙자한 작가들의 만용이 도를 넘어섰어요.

좋은 작품은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신을 보이기보다는 숨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실험이라는 이름아래 쉽게 내놓은 작품을 거창한 말로 덮어주는 평단도 문제예요.

우선 구상으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당분간은 구상에 집중하려 합니다"

한씨는 만화에도 관심이 많다.

''만화''라는 일본식 표현 대신 ''생활화''란 말을 쓰자고 주창하는 그는 조만간 지난 71년 그려놓은 만화작품들을 묶은 단행본 ''한아름 카툰 에세이''를 펴낼 계획이다.

전시는 오는 22일까지.

(02)734-0458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