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고사일이 되면 어제까지 따뜻했던 날씨라도 어김없이 뚝 떨어지는 것이 예년 일기(日氣)의 법칙이었다.
학원가의 일설을 빌리면 수십만 수험생들이 일생일대의 심판을 받는 날이라,일제히 기(氣)가 죽어서 천기(天氣)도 침몰해 날씨가 급랭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이론이다.
한국 청소년들의 시련은 세계적 토픽감이다.
단 하루 치르는 수학능력시험의 준비를 위해 새벽부터 자정까지,집과 학교와 학원을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는 것이 몇 년인가.
햇빛 못보는 수험생들의 얼굴은 웃음기를 잃고 창백하며,성장해야 할 몸체는 요통으로 휘어졌다.
서울대에 가면 작고 안경 낀 학생을 유난히 많이 만난다.
그토록 준비를 해 온 시험이지만,단 하루의 단칼에 결정되는 승부는 수험생들을 그날의 운세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한다.
당일 두통이라도 나면 물론 십년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그날 바이오리듬이 나쁘거나,감기에 걸렸거나,잠을 설쳤다거나, 심지어 자리를 잘못 잡아도 수능점수는 영향을 받는다.
수십만명이 무한경쟁을 하는 이 시험에서 한두문제가 잘못되면 귀착지가 일류대학에서 이류대학으로,인기학과에서 비인기학과로 내려간다.
그러면 또 한번 응시기회를 가지려고 열명 중 두명은 재수(再修)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대학입학만 하면 이들은 해방구에 들어온 자유인이 된다.
과거의 관성으로 수업시간을 지키던 새내기들은 곧 ''대학에서는 입학이 졸업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교부에서 주는 정원 TO에 등록금수입을 의존하는 사학은,유일한 재정원인 학생이 하나라도 퇴교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마치 고시합격자처럼 국가로부터 입학대학생의 자격을 얻은 몸이 된 이들에게,그 지긋지긋한 공부를 더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학생이 학점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학에서 면학분위기가 있을 수 없고,교수의 권위가 설 수 없다.
대학의 정원,대학생의 자격,그리고 대학평가까지도 정부당국이 좌지우지하는데 대학의 권위를 찾는 것은 난센스다.
과거 한 때에는 정부가 대학에 정치시위 학생의 제적을 강요하고,얼마 뒤에는 제적된 바로 이들을 다시 복교시키고 장학금까지 줄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일만 생기면 행정본부와 총장실을 점거하지만,이들을 제재하거나 처벌하는 학교는 없다.
미국의 평균 고등학생은 세월좋게 논다.
이들은 여러 대학에 입학을 지원하고,입학허가를 받은 몇개의 학교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대학은 많은 지원자들에게 입학허가서를 보내고,최종으로 이 학교를 선택한 학생들을 모두 수용한다.
이번에 1백명 뽑을 것을 예정하고 3백명에게 입학허가서를 보냈는데 50명만 등록했다면,다음 학기에는 입학자를 1백50명으로 조정하고 4백50명에게 입학허가서를 보낸다.
주립대학과 같이 주(州)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대학은 특별히 수학능력에 결격이 없는 한,세금을 내는 주(州)민의 자제에게 모두 수학기회를 줄 의무가 있다.
넘치는 저(低)학년들은 첫해와 둘째해를 지나면서 반으로,다시 반으로 줄어든다.
그 과정을 지나기 위해 철없던 학생들은 과거에 건강하게 쌓여진 체력을 소모하며 밤을 새우며 공부한다.
이들은 인도나 중국에서 온 조교로부터 말더듬이 강의를 들어야 하지만 불평을 할 수 없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한,그 조교에게서 학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정부가 나서서 대학이나 대학생의 자격에 대해 걱정을 하는 나라가 아니다.
하버드대학이나 6개월짜리 비서학원이나 다 ''칼리지''의 간판을 달기 때문에 ''가짜 대학생''따위의 웃기는 호칭이 없는 나라다.
그런데도 미국 대학의 생산성이나 경쟁력은 세계 으뜸이다.
반면 한국은 학부모와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생계가 휘어지는 투자''를 하며 마라톤 투쟁을 하는 나라다.
또 그 믿지 못할 대학이 혹시라도 교육을 망칠까봐 노심초사하는 정부가 있는 나라다.
그렇지만 그 대학의 현상은 보는 바와 같다.
무엇을 위한 도로(徒勞)인가.
누구를 위하자는 제도인가.
또 한번의 수능일을 맞아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