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조상들이 물려준 강역을 줄곧 인접국들에 빼앗기기만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60년 북경조약에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 일대가 러시아에 귀속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만강 하구의 군사요충지였던 녹둔도(鹿屯島)를 조정에서 알지도 못한채 러시아에 내어주고 말았다.

또 1902년에는 청과 간도협약을 맺어 우리가 개척해온 간도 땅을 청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도 두만강에 있는 신도(薪島·비단섬)는 중국이 아직 자기네 섬이라고 우기고 있고, 일본은 독도(獨島)가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탓으로 1백40년 전 러시아에 넘겨진 뒤 지도에서조차 사라진 녹둔도를 서울대 지리탐사팀이 지난달 답사했다는 소식이다.

둘레 20리의 섬이 갈대숲으로 변한채 퇴적물이 쌓여 완전히 러시아땅에 육속돼버렸다는 보고다.

사차마도(沙次麻島)라는 여진족 명칭으로 불리던 녹둔도가 우리 고유 영토로 문헌에 처음 기록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로 알려져 있다.

그 뒤에도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와 여진족의 내륙침입 방비에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1587년 섬에 여진족이 기습해 11명의 군사를 살해하고 군민 1백60여명을 납치하는 녹둔도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2천5백여기의 군대로 출정,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징벌하는 강경책을 쓰면서까지 섬을 지켰다.

당시 경흥부의 조산(造山)만호로 와있던 이순신(李舜臣)이 무공을 세운 것도 이때였다.

뒤늦게 섬을 되찾을 방법을 모색한 고종이 러시아 공사에게 반환을 요청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또 고종은 관리를 보내 녹둔도관계지도인 ''아국여지도''를 작성케 하기도 했다.

당시 섬에는 민가 1백13호,8백22명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해방직후까지 이순신의 녹둔도전승비각이 서있었다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없어진 모양이다.

비록 녹둔도가 이름조차 사라진 러시아 땅이 됐다지만 언젠가는 귀속문제가 재론돼야할 미수복 영토라는 점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