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해 조선왕조 5백년 사직이 종말을 고한 후 왕가의 역사는 세인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왕가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의 며느리가 파란눈의 이국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줄리아 리(78).

그녀는 영친왕의 외아들 이구 공과 결혼 후 몰락해가는 왕가의 모습을 지켜본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비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땅을 떠나 하와이에서 노년을 보내던 그녀가 이제 과거의 그늘을 벗기 위해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국방문길에 올랐다.

17일 방송되는 MBC 스페셜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연출 이종현,오후 11시5분)는 그녀의 방문일정과 증언을 통해 왕가의 가슴 아픈 과거를 되돌아 본다.

뉴욕의 한 건축회사에서 MIT 출신의 동양신사를 만나 결혼한 줄리아 여사는 지난 63년 남편과 함께 귀국한다.

하지만 쇠락한 왕가는 그녀를 고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손이 없다는 이유로 종친들로부터 끊임없이 이혼을 강요당하던 그녀는 82년 결국 남편의 얼굴도 보지못한 채 헤어지고 만다.

그 후 플라자호텔에 켈트공예점인 ''줄리아숍''을 열어 생계를 꾸리며 복지사업을 펼치지만 생활고 때문에 95년 하와이로 떠나게 된다.

지난 9월3일 중풍에 걸린 노구를 이끌고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 동안 소중히 간직해온 조선왕가의 유물 및 영왕과 남편 이구 공의 사진 4백50여점을 남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한달간 국내에 머물며 남편의 소재를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유물들을 덕수궁 박물관에 기증하고 돌아가며 이제 30년을 함께 했던 왕가의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편지를 남편에게 보낸다.

''신이 만든 운명일까요.

평범한 미국여자로 동양의 신사와 사랑에 빠지게하고 그 사람은 저를 조선왕가의 마지막 여인으로 만들었지요.

몰락하는 왕조속에서 보낸 30여년의 삶,이제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당신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편지를 씁니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