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도 본 적 없는 옛 조상들을 잊지 않으려고 시제(時祭)를 모시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는 풍경이 눈부시다.

저승으로 떠나신 분은 이승의 사람에게 아쉬움을 전하려면 꿈을 뚫고 들어올 수 있다지만,이승에 남겨진 사람의 아쉬움은 어쩌지?

가끔 혼자말로 아쉬움을 대신하거나 그 중얼거림이 부디 저승의 잠 속 꿈의 풍경으로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 볼 뿐인가.

지난해 나는 소중한 분을 먼 곳으로 떠나 보냈다.

살아 생전엔 잘 몰랐다.

그저 ''오래오래 그분의 따뜻함을 잊지 않아야지''했었다.

그런데 그분은 꿈을 꾸듯 현실을 끊고 저승으로 가버리셨다.

이런 경우 내 방식의 ''인연의 거리와 속도 조절''이 부끄러워진다.

그때 그때 아낌없이 주지 못한 마음들이 돌이 되어 가슴을 짓누른다.

오래오래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누군가 내게 얹어준 따뜻함의 두께를 느끼려 했던 나도 오래오래 누군가의 어깨를 감싸주는 따뜻함의 두께를 유지하려는 마음이 허공을 떠돈다.

아무튼 이런 경우 나의 방식은 실패한 것이다.

결국 그분은 ''유한한 존재''의 허망한 이별의 증례 하나 남기지 않은 채 표표히 떠나버린 것이다.

아니다.

소나무는 굵은 몸통으로 오래 살면 살수록 빛나는 목재가 되고,오이나 호박은 새콤달콤 제 맛이 완성될 때까지만 살며,백합은 누군가의 어둠을 밀어낼 때까지만 향기롭다고 믿어서다.

사람은 생각이 몸을 지배할 때까지만 살지 못하고,몸이 생각을 지배할 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 비애를 처절하게 겪기 전에 떠나시려고 그렇게 가 버리신 것이다.

가족의 동의도,나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또 다른 생을 찾아서-.

그렇다면 어떻게 인연의 거리와 속도를 조절해야 이처럼 허망하지 않는가.

''죽고 사는 일의 시점을 누가 헤아리리.그저 인연이 그뿐이려니''해야겠지.

남아 있는 그의 가족과 아주 조금씩,연하게 물들어 나갈 수 있는 인연의 시간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길이 있을 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