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이산상봉] "내가 너무 늦게 왔구려..." 50년 望失歌 유순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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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오.내가 너무 늦게 왔나보구려….몇 달만 있으면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50년만에 다시 만난 아내에게 북쪽의 남편이 어렵게 건넨 첫마디였다.
남쪽의 아내는 솟구치는 울음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결혼 6개월만에 남편과 헤어진 뒤 유복자를 키우며 수절하고 살아온 유순이(71) 할머니가 드디어 남편 김중현(66)씨를 만났다.
지난번 1차 상봉 때 남편의 이름이 명단에 들어있다가 제외돼 만나지 못한 터여서 이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반세기만에 상봉한 부부는 한동안 서먹한 듯 상봉장에 나오지 못한 다른 가족들의 안부를 묻더니 곧바로 서로의 손을 쓰다듬으며 옛정을 확인했다.
"고생 많았지.고생 안했을 턱이 있어.애들 데리고 지금까지 살아았는데..." 김씨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안타까와 했다.
태어나서 처음 아버지를 보게 된 아들 영우(49)씨도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시야에서 놓지 못했다.
영우씨는 "아버님,절 올리겠습니다"며 상봉장에서 큰 절을 올렸다.
유순이 할머니가 남편과 헤어진 것은 6.25전쟁 직후.
남편은 임신중이던 아내에게 "몇 달 뒤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인민군에 차출돼 충북 청주 신송리 집을 나섰다.
이때 할머니의 나이는 꽃다운 18세.
그 뒤 소식이 끊겼다.
유 할머니는 생사조차 알수 없는 남편을 숱하게 원망하며 자살도 여러번 생각해 봤다.
그러나 ''영우를 고아로 만들 수 없다''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재혼하라는 주위의 권유마저 뿌리친 채 파출부와 공사판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모진 목숨을 이어왔다.
하지만 너무 오래 소식이 끊긴 탓에 20년 전부터는 남편이 죽었다고 단정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아들 영우씨도 아픔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청주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17세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철물점과 목공소 등을 전전하며 자신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어머니를 보살펴왔다.
그러다 경기도 안양 S호텔의 보일러 기술자로 자리를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해오고 있다.
어린시절 주위에서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놀릴 때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원망했었다는 영우씨는 "이제 나도 아버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2시간 남짓 얘기를 나눈 세사람과 김씨의 누이 정숙씨(70),동생 정림(64),응현(52)씨 등은 다음날 있을 개별상봉을 기약하며 짧았던 단체상봉을 뒤로 했다.
/특별취재팀
50년만에 다시 만난 아내에게 북쪽의 남편이 어렵게 건넨 첫마디였다.
남쪽의 아내는 솟구치는 울음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결혼 6개월만에 남편과 헤어진 뒤 유복자를 키우며 수절하고 살아온 유순이(71) 할머니가 드디어 남편 김중현(66)씨를 만났다.
지난번 1차 상봉 때 남편의 이름이 명단에 들어있다가 제외돼 만나지 못한 터여서 이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반세기만에 상봉한 부부는 한동안 서먹한 듯 상봉장에 나오지 못한 다른 가족들의 안부를 묻더니 곧바로 서로의 손을 쓰다듬으며 옛정을 확인했다.
"고생 많았지.고생 안했을 턱이 있어.애들 데리고 지금까지 살아았는데..." 김씨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안타까와 했다.
태어나서 처음 아버지를 보게 된 아들 영우(49)씨도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시야에서 놓지 못했다.
영우씨는 "아버님,절 올리겠습니다"며 상봉장에서 큰 절을 올렸다.
유순이 할머니가 남편과 헤어진 것은 6.25전쟁 직후.
남편은 임신중이던 아내에게 "몇 달 뒤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인민군에 차출돼 충북 청주 신송리 집을 나섰다.
이때 할머니의 나이는 꽃다운 18세.
그 뒤 소식이 끊겼다.
유 할머니는 생사조차 알수 없는 남편을 숱하게 원망하며 자살도 여러번 생각해 봤다.
그러나 ''영우를 고아로 만들 수 없다''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재혼하라는 주위의 권유마저 뿌리친 채 파출부와 공사판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모진 목숨을 이어왔다.
하지만 너무 오래 소식이 끊긴 탓에 20년 전부터는 남편이 죽었다고 단정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아들 영우씨도 아픔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청주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는 17세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철물점과 목공소 등을 전전하며 자신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어머니를 보살펴왔다.
그러다 경기도 안양 S호텔의 보일러 기술자로 자리를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해오고 있다.
어린시절 주위에서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놀릴 때마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원망했었다는 영우씨는 "이제 나도 아버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2시간 남짓 얘기를 나눈 세사람과 김씨의 누이 정숙씨(70),동생 정림(64),응현(52)씨 등은 다음날 있을 개별상봉을 기약하며 짧았던 단체상봉을 뒤로 했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