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Economist 본사 독점전재 ]

반도체 분야에서 메모리칩 시장을 개척한 것은 미국이었다.

한때는 메모리칩 시장을 거의 다 장악할 만큼 미국은 엄청난 호황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난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일본과 한국이라는 아시아의 신흥세력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마이크론테크놀로지를 필두로 한 미국 반도체업체들은 한국과 일본 경쟁업체들에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일각에서는 반덤핑 로비 등을 미국 반도체업체들의 정상탈환 수단으로 지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반도체업계 부활의 진정한 견인차는 ''정치''보다는 ''자본조달''이다.

최근 미국 반도체업체들의 약진은 실리콘밸리의 주식을 기반으로 한 자금조달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메모리칩처럼 자본집약적인 산업에서는 경쟁업체보다 얼마나 저렴하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관건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반도체 공장을 하나 짓는 데 10억달러 이상이 소요된다.

그만큼 자본조달의 중요성은 크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같은 미국 반도체업체들은 대부분의 자금을 주식시장에서 조달하고 있다.

반면 한국이나 일본의 반도체업체들은 그동안 은행대출 등 주로 ''빚''에 의존해왔다.

사실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빚은 그다지 나쁜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한국 기업들은 정부가 지원하는 식의 대출 덕분에 거의 무이자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일본 업체들의 경우도 ''계열'' 은행으로부터 파격적인 조건에 대출을 맘껏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경제의 거품이 걷히고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이러한 관행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리고 미국의 증시에 기반한 자본조달 방식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대출과 주식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대출을 할 경우엔 경기가 좋거나 나쁘거나,다시 말해서 시장금리 조건에 관계 없이 꼬박꼬박 이자를 물어야 한다.

반도체처럼 경기에 민감한 산업 분야에서는 이 점이 큰 차이를 빚어낼 수 있다.

반도체 공장을 신설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이 분야 업체들은 경기가 바닥일 때,즉 실적이 가장 낮은 수준일 때 투자를 해야 한다.

시장이 회복될 때쯤이면 사업을 풀가동할 수 있도록 시기를 맞춰야 한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주식(대부분은 전환사채)을 통해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불황기에 보유 현금을 늘리고 동시에 영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축적,그같은 일을 쉽게 할 수 있었다.

반면 아시아 반도체업체들은 원리금을 상환하느라 헐떡거려야만 했다.

과거엔 기꺼이 만기연장을 해줬던 은행들의 태도도 이제는 달라졌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의 저렴한 자본조달 시대는 끝이 나고 이 지역 반도체업체들이 누리던 황금기도 사라졌다.

미국 증권사인 리먼 브러더스의 애널리스트 딘 나일스는 "마이크론은 빚더미에서 짓눌린 한국 기업들과 달리 증시를 통해 유리한 조건의 증자는 물론 해외확장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물론 자본조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2년전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경쟁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반도체 부문을 인수했다.

지난 10월에는 고베철강과의 합작법인인 일본 KMT세미컨덕터의 고베철강 지분 75%를 내년 3월말까지 5억달러에 사들이기로 했다.

최근 메모리칩 시장이 둔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재무구조는 끄떡없다.

이에 반해 빚에 허덕이는 고베철강은 신규자본을 끌어들이지 못해 아예 반도체 사업에서 철수할 태세마저 보이고 있다.

10여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변화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이제 막 시작단계에 들어선 듯이 보인다.

정리=고성연 기자 amazin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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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12월2일자)에 실린 사설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