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호 보령제약 회장(68)이 지난 57년 약업계에 몸담은 이후 걸어온 발자취를 정리한 회고록 "기회는 기다리지 않는다"를 14일 출간했다.

회고록에는 집념과 도전으로 만들어낸 제약 외길의 역사가 진솔하게 그려져있다.

베스트셀러 의약품이 된 "용각산"과 "겔포스"의 신화도 흥미롭게 기술돼 있다.

김 회장은 육군 공병단 중위로 제대한 뒤 친척 형의 약국에서 수습생활을 하다 "독립"을 결심했다.

서울 돈암동의 낡고 한옥을 판 돈 3백만환으로 지난 57년 종로5가에 "보령약국"을 세웠다.

당시 서울의 대형약국은 주로 도매기능을 했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약을 구하기 위해 여러 약국을 전전해야 했다.

김 회장은 마진을 줄이고 취급 약품을 늘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당시 약국들은 일부 제품에 대해 1백%에 가까운 폭리를 취하는 게 상례였지만 그는 이런 관행을 깨고 염가에 약품을 팔았다.

제약사에는 어음 대신 현금을 줘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약을 사들일 수 있었다.

창구에서 약을 내줄 때 일일이 품목과 수량을 기재하는 ''전표제도''를 도입하고 고객에게 진열대를 보이게 하는 ''오픈 진열대''를 만들어 신뢰도를 높였다.

약을 즉각 배달하기 위해 ''자전거부대''도 편성했다.

이같은 전략이 들어맞아 ''종로 행인 5명중 한 명은 보령약국 손님''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63년 약국을 약사인 동생에게 물려주고 부도가 난 부산의 ''동영제약''을 인수했다.

연지동 자택에 50평 규모의 공장을 짓고 아스피린 APC감기약 산토닌 항생제 등의 약을 만들었다.

김 회장은 67년 서울 성수동에 공장을 새로 짓고 생약성분의 진해거담제 ''용각산''을 생산했다.

기술은 일본에서 들여왔다.

김 회장은 당시 단일품목으로는 최대의 광고비를 쏟아부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광고문구로 대히트를 쳤다.

그러자 일본의 제약사들이 제발로 달려왔다.

연이어 ''구심''과 ''기응환''을 도입했다.

기응환의 인기가 치솟자 일제 유사품이 대량 유통돼 ''가짜 기응환 사건''을 치르기도 했다.

70년대에 들어서는 생약제제에서 탈피,현대화된 신약생산에 눈을 돌렸다.

74년 안양에 연건평 2천4백평에 달하는 공장을 준공하고 본격적으로 ''겔포스''를 생산했다.

77년부터는 항생제 원료를 자체 합성하기 시작해 백신 항암제 등의 바이오약품을 생산하는 기초를 다졌다.

특히 고혈압치료제인 ''카프릴''은 미국의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과 특허분쟁이 붙었으나 5년여의 지루한 분쟁에서 승리,한국 제약기술의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다.

이어 백신전문회사 보령신약과 육아 청소년 용품업체인 보령메디앙스를 잇달아 창업해 헬스케어 전문그룹으로 기틀을 다졌다.

김 회장은 요즘 바이오산업과 교육컨설팅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 생명공학연구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 바이오산업의 수준이 미국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도록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무엇보다 교육시스템이 발달돼야 한다며 교육 소프트웨어 개발과 체계화에 남은 정열을 쏟겠다고 밝혔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