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총회에 A,B 두 의안이 차례로 상정될 때 주주들은 그의 의결권을 A의 표결때와 B의 표결때에 각각 행사한다.

A의 표결때 행사할 수 있던 것을 아껴뒀다가 B의 표결때 모아서 행사할 길은 없다.

그런데 2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경우엔 그렇게 할 길이 상법에 마련돼 있다.

이에 의하면 소수주주(예를 들어 35%의 주식을 가진 주주)가 첫번째 이사의 선임때 행사할 수 있던 것을 아껴뒀다가,두번째 이사의 선임때에 모아서 행사하여(그의 의결권이 70%로 됨) 그가 지지하는 후보를 이사로 선임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집중투표제가 IMF 사태로 기업의 구조조정이 급격하게 요구되던 1998년에 우리 상법에 도입됐다.

미국모범회사법과 일본상법에 들어 있는 것을 당시 정부가 깊은 검토 없이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도입 후 많은 회사들이 정관으로 이의 적용을 배제,이 제도가 실제로 그리 이용되지는 않고 있다.

미국과 일본에서도 그렇다.

정부는 99년에도 상법 개정작업을 펼쳤고,이어 올해에도 그 작업을 펴 입법예고 중이다.

그 작업 중에 이 제도의 적용을 정관으로도 배제할 수 없도록 하자는 의견이 일각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의견이 입법예고 중인 안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자 의원 입법의 형식으로 그 의견이 발의될 것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의 기본질서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주식회사의 운영도 이 원칙에 따르게 되어 있다.

이 원칙은 우리의 기본질서이므로 우리는 이를 굳게 지켜야 한다.

이 원칙은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소수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면서,최종적인 결정은 다수 의견에 맡기는 것이다.

최종적인 결정까지 소수 의견에 맡기는 것은 이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두 자리의 이사를 선임할 경우에 첫번째 이사 선임과 두번째 이사 선임은 별개의 의안이요,따라서 각 의결권도 전혀 별개다.

첫번째 것을 아껴두었다가 두번째에 보태어 행사하게 할 수는 없다.

집중투표제란 두번째에 배(倍)의 의결권을 주기 위해 내세운 억지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실일 뿐이다.

이 제도는 다수결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다수결의 원칙이 최선이 아님은 일찍이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 밝혀졌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차선이라고 말한다.

성군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것이 최선이지만,성군을 기다리다가 폭군에 시달릴 염려가 크므로 인류는 일찍이 차선을 택한 것이다.

그러면 집중투표제가 차선에서 최선을 향해 단 한발짝이라도 나가게 하는 제도라도 될까.

그렇지도 않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그런 보고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98년 상법개정때 회사의 부실을 막는 방부제라도 되는 줄로 잘못 알고 정부가 이를 도입한 것 같다.

주식회사의 이사회는 오로지 회사의 이익,즉 이윤의 극대화라는 총주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기관이다.

그런 이사회를 처음부터 다수를 대변하는 이사,소수를 대변하는 이사로 구분하여 구성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같은 맥락에서 근로자를 대변할 이사를 따로 선임하는 것도 안된다.

그리고 이사회는 근로자와 경영자 사이의 이해를 조정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조정은 다른 자리를 빌려 할 것이다.

상법에는 다수결의 원칙에 대한 보완책으로 다수를 억제하고 소수를 지원하는 제도들이 여럿 들어 있다.

중요의안의 결의에 가중과반수(3분의 2)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주주제안,주식매수청구제도 등이 그런 것들이다.

거기에 더하여 집중투표제까지 도입할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집중투표제란 다수결의 원칙에 대한 변칙임에 틀림없다.

변칙의 입법은 최소화해야 한다.

그런 터에 변칙의 입법을 하면서 이를 벗어나 원칙으로 돌아갈 길마저 막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런 입법은 위헌 입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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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서울대 법학과
△서울지방법원 판사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