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 첫 해를 마감하는 송년의 길목이 황량하기만 하다.

은행원의 파업과 금융마비,도산 위기의 기업들,최악의 주식시장,실업의 위협과 농가채무에 시달리는 노동자와 농민,그리고 탈진상태의 중산층-.

우리 사회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특히 우려되는 건 위기 그 자체보다 우리 모두를 엄청난 중압으로 내리 누르고 있는 공황심리다.

절망감 냉소주의,그리고 패배주의가 우리의 앞날을 더욱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왜 이러한 형국을 맞이하고 있는가? 대통령과 정부 탓만 할 수는 없다.

현재의 총체적 위기는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구조적 경직성의 필연적 귀결이라 하겠다.

IMF 위기극복의 환각현상과 그에 따른 자만과 나태,집단이기주의의 폐해,그리고 이를 추스를 수 있는 사회적 자본과 지도력의 결여 등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경직성을 심화시켜왔던 것이다.

따라서 누구를 탓할수 없다.우리 모두가 오늘의 어려움을 야기시킨 공범자들이다.

그러면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간단한 해법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냉철한 현실인식이다.

우리의 위기는 구조적 현상이며,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안정화 시책과 달리 구조조정은 단시간에 이뤄질 수 없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의 사례를 봐도 경제구조의 개혁은 10년이상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마감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내 모든 구조조정을 일격에 완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버려야 한다.

경제 현실에 맞게 순리대로 가능한 것부터 실천해나가면서,타 부문에 대한 전후방 파급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작업이 절실히 요청된다 하겠다.

여기서 한가지 유념해야할 점은 사회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키는 구조조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공적 구조개혁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후생을 증진시켜 주지만,그 과정에 있어선 숱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고통의 심도가 깊을수록 개혁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는게 구조조정의 역설적 본질이다.

금융개혁 기업구조개선,그리고 공기업 민영화 등 구조조정 노력은 자본과 노동 모두의 과도기적 희생을 요한다.희생과 고통이 없는 구조조정은 파우스트적 흥정에 기초한 대중영합주의로 종국에는 우리 경제의 실패를 가중시킬 뿐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는 사회세력의 정치적 저항을 피하기는 어렵다.더구나 생존권을 위한 이들의 투쟁을 파괴적 집단이기주의로만 매도할 수도 없다.

집단이기주의는 모든 사회의 기본적 속성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헌법으로 보장된 권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구조조정의 성패는 이러한 집단이기주의의 폐해를 어떻게 잘 추스려 나가느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를 잠재우고 국민적 합의 기반하에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법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법에 의해 허용된 집단행동과 그 요구에 대해선 정부가 성실히 수용해 줄 의무가 있다.

그러나 탈법·불법적 집단행동에 대해선 예외없이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정부 역시 법과 제도에 충실해야 한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자의적인 행동을 취할 때 정부의 정통성은 크게 훼손되고 무질서와 혼돈이 가중될 뿐이다.법의 지배를 통한 사회적 공정성이 실현될 때 고통받는 사회 세력의 저항은 크게 완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위기 극복의 과정에 있어 정부는 솔직해야 한다.

진실만이 국민을 설득하고 합의 기반을 도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공적자금 투입문제나 일부 은행 감자 조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정치적 또는 관료적 이익 때문에 위기의 진면목을 왜곡하고 국민을 오도할 때 정부와 시장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실종되고 위기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구조조정과 경제회생의 대장정에 필수적인 덕목은 우리 모두의 인내다.

국민의 자발적 인내없이 구조조정은 성공할 수 없다.

국민의 자발적 인내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고통분담의 형평성이 선행돼야 한다.

그리고 그 인내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머지않아 절망의 터널을 헤치고 나올 수 있다는 희망과 비전을 심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