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초 뭔가 새로운 기운이 일 듯하던 이 나라는 다시 암초에 걸리고 있는 느낌이다.

다사다난이 아니라 매사곤란의 지경에 빠져 이제 새천년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흩어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두들 전전긍긍이다.

지금 우리는 불신,미속,광기,자원 남용,인간적 희생의 강요,상업주의,극단적 자본 위주,돈 만능 등 베이트슨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그런 경향을 부인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M&A,벤처기업,주식시장같은 것은 생산과 관계없이 부를 끌어들이고 모든 인간 생명의 기초가 되는 농업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지 이미 오래다.

그렇다고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가 가진 것을 유심히 살펴보면 희망의 실마리라도 잡아낼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리어왕에서 세익스피어는 말한다.

"오,필요를 논하지 말라! 아무리 천한 거지의 소유물이라도 그 중에는 필요 이상의 것이 있는 법이다. 필요한 이상의 것을 자연이 허용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은 짐승의 생명처럼 하찮은 것이다"

그 필요 이상의 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믿는다.

새해,유일하게 남북의 큰 강이 만나는 장소,한강과 임진강이 몸을 맞대며 김포반도를 거쳐 강화로 빠져 나가는 시발점,그곳에 통일공원과 오두산 전망대가 있다.

오란 커다란 자라를 뜻한다.

자라 머리 모양의 이 산은 바로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점을 바라보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과 북의 강물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맞는 새해는 새로운 감회에 젖을 수 밖에 없다.

분단 50년이 넘어서고 있지만 작년만큼 교류가 빈번했던 적은 없다.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그 상징성의 정상을 차지한다.

전망대에서는 난감했던 지난해를 보내고 새 희망을 기대하는 양,"통일기원 미술축제"가 열리고 있다.

우두커니 북서쪽을 바라보며 재작년 돌아보았던 장단,개풍,개성 쪽을 바라보지만,예전처럼 아득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곧 갈 수 있는 땅처럼 여겨져 낯이 덜 설다.

"퍼주기만 한 대북 정책"이란 혹평도 없지 않았으나,그 전에는 또 어떤 만들을 했었나.

통일 비용이 어떻다고들 하지 않았던가.

북한의 경제 사정이 호전된다면 그것은 결코 남측에 손해날 일은 아닐 것이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지만 예전에는 교하 땅이었던 곳이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교하 천도설로 이어진다.

내가 통일 수도로서 교하를 거론한 것은 1989년 당시 국통개발연구원 학술지인"국토연구"에 논문을 발표하면서이다.

이 논문에는 그 적지로 개성을 꼽았다.

그러다가 정신문화연구원의 논문집인 "정신문화연구"에 발표한 논문에서 교하 천도론을 거론한 것이 시발이 되어 동아일보가 같은 해 11월 그 주장을 좀 과장해서 기사화했고 그 뒤 여러 신문에서 그것이 언급됨으로 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사실 교하 천도론은 광해군 때 이의신이란 지리학자에 의하여 제기된 바 있다.

근거로 서울의 땅 기운이 다하였다는 점,임진왜란이라는 미중유의 대란을 겪었기에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다는 점,역적들의 변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점,신하들이 당파 싸움을 한다는 점,사방의 신들이 벌겋게 벗어지고 있다는 점 등을 꼽았다.

이의신의 주장은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그는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광해군의 국가 계책을 올린 자를 벌할 수 없다는 명분론에 기대어 죽음은 면한다.

하지만 광해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생각하여 은근히 천도를 생각하지만 물론 허사가 되고 반정으로 임금자리마저 쫓겨나고 만다.

당시 천도가 과연 가능했겠느냐 하는 문제는 내 전공이 아니므로 일단 접어두고,만약 단행했다면 광해군의 입지는 나아졌을 것이란 생각은 든다.

국력을 기울여 행해야 할 천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기에 다른 모든 문제들이 덮여질 가능성이 있기에 해 본 소리다.

오두산을 뒤로 하고 교하를 향한다.

교하를 수도로 했을 때 정치의 중심지로 꼽은 혈처인 교하중학교로 가는 길에 잠깐 "묏버들 갈해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자시는 창밧긔/심거두고 보쇼셔/밤비에 새닙곳 나거든 나린가도 너기쇼셔"라는 시조의 지은이인 기생 출신 홍랑의 묘소를 잠깐 들린다.

홍랑의 산소는 그의 애인이자 남편인 고죽 최경창의 무덤 바로 아래 있다.

최경창은 이조판서로 추중된 인물로 당대의 문객이자 시인이면서 등소를 잘 붙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히 풍류가인이었던 모양인데 홍랑 또한 그에 못지 않아 서로 주고 받은 연애의 시는 지금도 절창이라 평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최경창이 세상을 뜨자 홍랑은 3년의 시묘살이를 하고 수절을 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본향인 해주최씨 문중에서 그녀를 받아들이고 신위를 받들고 있다고 한다.

아,참으로 애절한 사랑이다.

통일수도 터를 보러가며 사랑을 떠올리는 일은 땅의 조화일 수 밖에.

남북은 화해를 넘어 사랑으로 결합해야 할 시점이 곧 닥쳐오리니.

오도리,나의 도를 깨닫는다는 지명의 마을 뒤에 있는 장명산의 기운은 가늘게 홀로 교하중학교로 내려와 혈을 이루니 이곳에 통일 대통령과 정부 요인이 거처를 정하고 집무를 한다면 그 아니 좋을쏜가.

남동쪽으로는 황룡산이,남서쪽으로는 심학산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학의 절개와 용의 기상으로 통일 조국을 빛낼 수 있음을 이미 땅이름이 에고하지 않는가.

문득 박완서선생의 소설"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중 교하를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 떠오른다.

"이 근처선 교하가 예로부터 양민들 피난 고장이라우.두 강이 만나는 평지라 몸 숨길 데는 만만찮고 도망가기는 어려워서 전쟁터론 마땅치가 않아 그럴거요. 논이 많아서 먹을 것도 많고 인심도 후하다오."

이에 대해서 평론가 이남호씨는 작품해설에서 "교하라는 마을은 두 줄기 큰 강이 만나는 곳으로 넓고 비옥한 고장이었다. 더구나 그곳은 참으로 이상하리만큼 전쟁의 냄새가 나지 않고 살림의 냄새가 남아있는 포근한 곳이었다. (중략)

언젠가 최창조가 통일수도의 자리로 교하면을 지적했을때 여러가지 지세나 입지조건으로 보아 그럴듯한 정도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박완서의 교하면 피난체험을 읽고 나니,교하면이란 곳이 정말 신비한 기운을 간직한 땅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그곳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런 땅이다.

동행한 사진작가 정동헌차장이 불평 비슷하게"도무지 이곳은 산이 밋밋해서 좋은 사진을 얻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이 신비하다는 것이다.

아무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네 평범한 어머니같은 땅이기에 풍경이 밋밋할 수 밖에 없지만,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서 어머님의 품 속과 같은 안온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교하중학교 교사 뒤에는 잔솔밭이 있고 가녘에 정지가 하나 서있다.

도로에서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딘가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 특이한 명당구 구조이다.

정문에 걸려 있는 이 학교 졸업 예정자들의 다른 고교 수석,차석 입학생들의 현수막이 인정을 더한다.

눈쌓인 운동장은 고즈넉하다.

통합,교류,사람,어머니,신비함,인정이 쌓인 교하 땅이 우리를 물질이 아닌 인간적 희망의 땅으로 이끄는 기폭제가 되기를 신사년 원단을 맞아 간절히 바란다.

< 본사 객원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