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에게 밥을 많이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비만이 문제가 되고 있고,운동을 해야 건강해진다고 한다.

금융도 마찬가지이다.

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 정부도 은행이 망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각종 금융규제는 금융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금리를 규제해서 일정수준의 마진을 확보해 주고,업무영역을 구분하고 진입을 제한함으로써 수익기반을 지켜 주었다.

나아가 자본의 국가간 이동이나 외국 금융회사의 국내진출을 억제하여 금융시장의 여건을 잔잔한 호수처럼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나라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비슷하였는데 내재적인 모순이 축적되다가 80년대와 90년대의 금융혁신을 통해 구조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소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금리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져 금리규제가 시장의 힘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또 금융의 증권화가 진전되고 투자신탁이 보편화되면서 은행과 증권 사이의 업무영역 구분이 모호해졌다.

여기에 더해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됨에 따라 진부한 금융규제가 자국 금융시장을 공동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자 각국이 경쟁적으로 금융규제를 완화.철폐하는 양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편의성이 증대되었지만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구조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즉 규제와 보호의 온실 속에서 과잉비대화되었던 금융회사들이 이합집산을 하거나 군살빼기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충격과 강도는 금융의 여러 분야 가운데 은행에서 가장 격심하였다.

이는 은행에 대한 규제가 가장 강하였기 때문이다.

규제가 강했다는 말은 곧 보호도 강했다는 뜻이므로 시장경쟁에 노출될 때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찰된다.

은행의 구조조정이 파업과 농성으로 얼룩지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반면 애초부터 시장과 호흡을 같이 했던 증권회사들은 외부여건이 악화되자 인력과 급여를 줄이고 합병을 모색하는 한편 심지어는 본사사옥도 미련없이 매각하고 있다.

흔히들 금융산업의 국제경쟁력을 획기적으로 제고할 수 있는 정부의 정책방안을 제시하라고 주장하지만 왕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시장경쟁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성역없이 신속하게 대응하는 길만이 최선의 선택이다.

오랜 기간에 걸친 시장경쟁의 결과로 형성된 선진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서 있는 나라의 금융산업은 소수(2~4개)의 대형은행과 다수의 전문 금융회사 그리고 지역금융 등 틈새시장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소형금융회사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정도의 경제규모에서 전국적인 영업망을 갖춘 은행이 우리처럼 많은 나라는 찾기 어렵다.

이는 한국의 은행산업에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정황증거라 볼 수 있다.

경쟁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경쟁력이 취약한 것이다.

미국에는 자산규모 세계 1백대 은행 가운데 18개가 있지만 수차례의 합병을 거친 상위 3개 은행의 자산이 이중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대내외적인 신인도,후선업무의 집중처리 그리고 특히 천문학적인 IT투자 수요 등이 규모의 경제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게끔 하는 주요 요인들이다.

일본을 제외한 선진국의 은행들은 예대마진이 4%포인트를 넘고,가계예금에 대해 매달 1만~2만원씩의 계좌유지 수수료를 부과하는 등 수익성이 한국의 은행에 비해 갑절이상이 된다.

금리나 수수료가 자유화되어 있고 생산성 제고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이 정도의 수익기반을 갖추지 않고서는 존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은행이 예금금리를 올리거나 수수료를 낮추면 경영이 부실하여 유동성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간주되는 실정이다.

우리 은행이 이처럼 과감하게 예금금리를 내리고 고율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면 과당경쟁 때문인가 국민정서 때문인가.

이유가 무엇이든 선진국 은행수준의 수익창출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선진국 수준의 기업부실도 자체적으로 처리하지 못함은 명백하다.

한국의 은행이 자생력을 갖추어서 구조조정을 마무리하려면 수익성이 지금보다 배가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경쟁력이 배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