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일의 그림읽기] (20) 김정희 '세한도(歲寒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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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종이에 수묵,23.3X108.3㎝)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1844년에 그린 그림이다.
1974년에 국보 180호로 지정된 명품.
겨울추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의젓하게 서있는 모습을 그렸다.
세한도는 작품이기 전에 추사의 심경이 그대로 살아있는 명작이다.
갈필을 사용한 간결한 필의와 전예(篆隸)의 필법이 가해졌다.
자연미의 고담한 멋과 화면을 추상화한 구성이 돋보인다.
추사예술의 백미인 포치(布置)가 놀라우리 만큼 완벽하다.
현대인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똑떨어진 구도다.
이 그림은 추사가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1804~1865)의 두터운 정의에 감복해 그린 것이다.
추사의 문인(門人)인 우선은 사절 수행차 여러차례 중국을 내왕하면서 하우경의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과 계복의 ''만학집(晩學集)'',하우경이 편집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1백20권)을 구입해 제주도에 귀양가 있는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는 이같은 우선의 고마운 뜻에 보답하기 위해 세한도를 그리고 작품 말미에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는 글을 썼다.
추사는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내가 지금 절해고도(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우선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이 생각하여 이런 귀중한 책을 만리타국에서 부치는 그 마음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것인가.
공자는 ''추운 철이 된 뒤에라야 송백(松柏)의 푸른 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였으니 잘살 때나 궁할 때에나 변함없는 그대의 정이야 말로 바로 세한송백(歲寒松柏)의 절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며 자신의 처절한 심경과 우선에 대한 고마움을 적고 있다.
세한도는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였으며 추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지즈카 도나리의 손에 들어갔다가 2차대전 말기에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의 집요한 ''양도작전''으로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
1944년 종전을 한 해 앞둔 도쿄는 연일 공습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소전은 폭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후지즈카 집 근처에 여관을 얻어 진을 쳤다.
그 때 후지즈카는 노령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다.
소전은 매일 아침 찾아가 문안 인사만 올리고 되돌아 왔다.
그러나 후지즈카는 도쿄의 사정이 신변에 위험하니 빨리 돌아가라고 할 뿐 세한도를 양도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지즈카는 90일째 되던날에야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해서 자네 앞으로 보내 줄 터이니 이제 돌아가라"고 했다.
후지즈카는 맏아들을 불러 소전이 보는 앞에서 "내가 죽거든 조선의 손재형에게 아무 대가도 받지 말고 세한도를 돌려 보내라"고 했다.
유언이나 다름없는 약속을 받고도 소전은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열흘 동안 더 문안을 드렸다.
백일째 되는 날 비로소 후지즈카는 "전화(戰禍) 속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여기까지 찾아온 성심을 저버릴 수 없어 그냥 주는 것이니 부디 잘 모셔가라"면서 세한도를 내놓았다고 한다.
월간 아트 인 컬처, 발행인
1974년에 국보 180호로 지정된 명품.
겨울추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의젓하게 서있는 모습을 그렸다.
세한도는 작품이기 전에 추사의 심경이 그대로 살아있는 명작이다.
갈필을 사용한 간결한 필의와 전예(篆隸)의 필법이 가해졌다.
자연미의 고담한 멋과 화면을 추상화한 구성이 돋보인다.
추사예술의 백미인 포치(布置)가 놀라우리 만큼 완벽하다.
현대인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똑떨어진 구도다.
이 그림은 추사가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1804~1865)의 두터운 정의에 감복해 그린 것이다.
추사의 문인(門人)인 우선은 사절 수행차 여러차례 중국을 내왕하면서 하우경의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과 계복의 ''만학집(晩學集)'',하우경이 편집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1백20권)을 구입해 제주도에 귀양가 있는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는 이같은 우선의 고마운 뜻에 보답하기 위해 세한도를 그리고 작품 말미에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는 글을 썼다.
추사는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내가 지금 절해고도(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우선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이 생각하여 이런 귀중한 책을 만리타국에서 부치는 그 마음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것인가.
공자는 ''추운 철이 된 뒤에라야 송백(松柏)의 푸른 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였으니 잘살 때나 궁할 때에나 변함없는 그대의 정이야 말로 바로 세한송백(歲寒松柏)의 절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며 자신의 처절한 심경과 우선에 대한 고마움을 적고 있다.
세한도는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였으며 추사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지즈카 도나리의 손에 들어갔다가 2차대전 말기에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의 집요한 ''양도작전''으로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
1944년 종전을 한 해 앞둔 도쿄는 연일 공습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소전은 폭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후지즈카 집 근처에 여관을 얻어 진을 쳤다.
그 때 후지즈카는 노령으로 병석에 누워 있었다.
소전은 매일 아침 찾아가 문안 인사만 올리고 되돌아 왔다.
그러나 후지즈카는 도쿄의 사정이 신변에 위험하니 빨리 돌아가라고 할 뿐 세한도를 양도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지즈카는 90일째 되던날에야 "내가 눈을 감기 전에는 내놓을 수 없지만 세상을 뜰 때 맏아들에게 유언해서 자네 앞으로 보내 줄 터이니 이제 돌아가라"고 했다.
후지즈카는 맏아들을 불러 소전이 보는 앞에서 "내가 죽거든 조선의 손재형에게 아무 대가도 받지 말고 세한도를 돌려 보내라"고 했다.
유언이나 다름없는 약속을 받고도 소전은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열흘 동안 더 문안을 드렸다.
백일째 되는 날 비로소 후지즈카는 "전화(戰禍) 속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여기까지 찾아온 성심을 저버릴 수 없어 그냥 주는 것이니 부디 잘 모셔가라"면서 세한도를 내놓았다고 한다.
월간 아트 인 컬처,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