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마지막 국무회의가 열린 지난달 26일 오전 청와대 세종실.

국회에서 넘어온 법률안 공포안 31건, 정부에서 준비해온 상법개정안 등 법률안 2건, 각종 세법의 시행령 18건 등 대통령령 27건, 중앙행정권한의 지방이양 추진건 등 일반안건 2건, 광주민주화운동 보상금 문제 등 즉석 안건 1건, 공공기관의 중소기업제품 조기구매 추진계획을 포함한 보고안건 6건 등 모두 69건이 안건으로 올라 왔다.

참석자는 김대중 대통령, 이한동 총리, 18명의 장관에다 장관급인 배석자 10명 등 30명.

법률공포 안건이 평소보다 많기는 했지만 1시간26분간 회의가 열려 평균 1분15초만에 한건씩 처리됐다.

당시 경제 사회적으로 최대 현안은 국민.주택은행의 합병문제.

합병에 반발한 1만명이 넘는 은행원들이 일산 국민은행 연수원에 모여 대규모 농성을 벌이고 두 은행의 업무는 파행을 거듭하던 때였다.

그러나 국무위원들끼리 토론과 심의는 고사하고 사회를 대신 맡은 총리의 ''의결''을 선언하는 의사봉 두드리는 소리만 이어졌다.

은행합병과 농성이라는 현안에 대해서는 노동부장관과 법무장관이 원론수준의 보고만 했다.

3일 후인 29일 과천청사 재정경제부 회의실.

경제관련 장관들과 경제 5단체장, 민간전문가 등 30여명이 김 대통령 주재로 국가경쟁력강화 점검회의를 가졌다.

2001년 경제운용계획을 확정하는 중요한 회의였지만 발언자는 많지 않았다.

진념 재경부 장관은 정부 확정안을 읽어나가기에 바빴다.

심도 있는 토론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새해 들어 지난 3일 국무회의가 또 열렸다.

이날 안건도 법률 공포안건 9건과 2001년도 입법추진 상황이라는 보고안건 1건 등 10건.

배석자 포함, 30명의 참석자들이 모여 온갖 의결.보고안건을 심의하도록 국무회의 관련 규정(시스템)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소매를 걷어붙인 대통령이 책상에 걸터 앉은 채 3∼4명의 장관이나 비서관들과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미국 백악관의 한 장면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국무회의뿐만이 아니다.

그 밖의 회의로도 장관들은 바쁘기 짝이 없다.

전윤철 기획예산처 장관이 ''위원''으로 참석해야 하는 위원회와 회의는 공식적인 것만 47개다.

국회일정 등을 이유로 김병일 차관을 대신 보내기도 하지만 김 차관 역시 별도의 21개 위원회나 회의의 당연직 위원이어서 회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법규에 따른 회의뿐이 아니다.

점검회의 평가회의 등 그때마다 열리는 수시회의도 많다.

장관들 스스로도 회의 때문에 현안을 심사숙고할 틈이 없다고 불평한다.

진념 재경부 장관은 "각종 회의와 국회 출석에다 이해관계 조정에 시간을 너무 많이 뺏겨 정책을 구상할 틈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재경부 장관은 하루에만 6∼7번 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회의 때문에 장관들이 생각할 틈조차 없다며 불평이지만 이는 정부 스스로 초래한 결과다.

각 부처마다 행정편의와 책임소재를 분산하기 위해 위원회를 앞다퉈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속으로 17개, 건설교통부 소관 35개, 행정자치부 소관 34개, 보건복지부 소관 30개, 산업자원부 소관 23개 등 법령에 근거가 있는 것만으로도 3백54개(행정위원회 29개 포함)의 위원회가 있다.

위원회의 소관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총리실 소관 위원회는 현재 7개뿐이지만 총리가 위원장인 위원회는 34개나 된다.

정부가 국회에 대해 과도하게 눈치를 살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각 정부기관마다 국회의 현장을 중계하는 스퍼커 폰을 설치한지 수년이 지났고 국정 채널인 K-TV가 화면으로 종일 생중계하지만 국회가 열리는 날이면 각 부처마다 과장급이상 간부들은 물론 사무관까지 수십명씩 국회 복도에서 진을 친채 국회 일정만 쳐다보고 있다.

회의 하듯이 얼굴을 맞대야 일이 풀리는 것이다.

모 부처 국장은 "수시로 장관이 바뀌다보니 모든 부처 업무를 자신있게 꿰뚫지 못하게 되고 혹시 의원 질의에 답변이라도 막힐까봐 국.과장은 물론 담당 사무관까지 달려가 대기해야 하는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탄식했다.

허원순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