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미대통령이 지난 20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바람둥이'' ''거짓말쟁이''에다 ''탄핵소추로 대통령직을 잃을 뻔한'' 그였지만 미국인들의 최근 지지율은 취임초보다 더 높아진 65%(CNN조사)에 이를 정도의 신비를 간직한 대통령으로 남게 됐다.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그에 대한 애증(愛憎)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상 유례없는 ''10년 호황''은 그 골간을 이루는 요인임에 틀림없고 그가 이룩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등 따뜻하고 배부른 이른바 고복(鼓腹)상태''를 만들어 낸 것은 클린턴이 아니라 ''레이건 정부의 씨 뿌리기''와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의 ''능수능란한 경제운영''때문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앉아 있던 그가 ''정치적 균형감각''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평가 또한 적지 않다.

이 점은 조지 부시 신임대통령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클린턴을 평가해달라는 CNN의 요구를 받고 부시는 "클린턴은 능숙한 정치인(deft politician)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다수당인 공화당을 상대로 멋진 머리싸움을 벌여 행정부가 챙겨야 할 것들을 제대로 챙긴 보기 드문 대통령이었다"고 극찬한 것이다.

"다수당이 아니라서 정치하기 힘들다"며 ''의원 꿔주기''나 일삼는 한국과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

회사에는 사장이 할 일이 있고 대리가 할 일이 따로 있다.

사장이 대리의 일까지 챙기면 회사는 결딴이 난다.

클린턴은 사장이 넘보지 말아야 할 영역을 잘 아는 ''동물적 육감''의 소유자였다.

경제는 그린스펀 의장과 기업인들에게 맡겼다.

이같은 ''나에겐 묻지 마시오''식 그의 경제철학이 ''10년 장기호황''을 만들어 낸 근간이라는 평가가 많다.

시장경제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자율(自律)과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실천한 대통령이었다는 뜻이다.

"경제는 내가 직접 챙기겠다"는 한국식 근시안을 그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수사자는 암사자들과 새끼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다. 그런데 이 수사자는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빈둥거린다.

나무밑에서 잠이나 자고 암사자들이 꼬랑지를 흔들면 사랑해주고 그게 다야.사냥도 안하고 일도 안해.어쩌다가 마지 못해 영토를 한번씩 둘러보면 그걸로 끝이야.그러나 수사자가 크게 한 번 울면 사바나 전체의 동물들이 숨을 죽여.그래서 백수의 왕이라 그래.그게 바로 (노자가 말하는) 명백사달(明白四達)이야"

한국에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는 책, ''노자를 웃긴 남자''에서 저자 이경숙씨가 노자를 빌려 거론한 ''사자같은 지도자 상(像)''의 모습이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소식(小食)하고 10대이상 때려야 하는 형벌은 직접 손을 대야 직성이 풀리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이 결국에는 제풀에 지쳐 사마중달에게 패하고 말았다는 내용을 담은 ''식소사번(食少事煩)''이라는 삼국지 고사성어와 다를 바 없는 설명이다.

돌이켜 보면 클린턴이야말로 틈만 나면 골프나 치던 ''사자같은 정치인''이었다.

사자처럼 놀고먹는 클린턴의 역설적 균형감각과 정치적 수완이야말로 미국경제를 오늘의 반석위에 올려놓은 핵심이자 요체였다는 게 미국을 아는 사람들의 설명이다.

우리는 백악관 잔디에 나와 뿜어대던 그의 매혹적 연설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이제 상원의원이 된 부인 힐러리 뒷바라지나 해야하는 발톱빠진 수사자 클린턴이지만 그가 한국인들에게 남긴 묵시적 정치훈수는 그 어느 것보다 값지고 인상적인 것이다.

양봉진 워싱턴 특파원 yangbong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