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양국간에 체결한 통신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김영삼 대통령이 막 당선자의 꼬리표를 떼고 청와대에 이삿짐을 풀기 시작하던 때다.

미국의 불만은 한국 정부가 한국통신의 통신망장비 조달 입찰에 미국기업이 한국기업과 같은 조건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했는데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기업의 참여를 봉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이 사안은 미국기업과 한국기업간 마찰이기 때문에 이들 기업이 해결해야 할 문제지, 정부가 나설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을 처음 한동안 고수했다.

신정부가 막 출범하던 때라 한.미간 통상마찰을 표면화한다는 것은 직업관료로서 무모한 처신이었을 수도 있다.

미국기업이 불만을 제기하는 근거가 한.간 협정에 의한 것이었으며,협정 이행 의무의 주체는 양국 정부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측의 이러한 회피적인 태도는 미국측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협정의 당사자인 정부가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기업에 떠맡긴 와중에 미국 정부에는 불만을 갖고 있는 미국기업의 일반적인 주장이 진실인양 그대로 속속 제공되었다.

한국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진화에 나섰을 때는 이미 문제를 보는 양국간의 시각이 크게 벌어진 뒤였다.

초기의 부적절한 대응이 불신과 오해를 증폭시켜 미국이 한국을 무역보복 직전까지 몰고 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갓 출범한 클린턴 행정부의 신임 캔터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강력한 무역전사''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명분이 취약한 한국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한국의 통상당국자들은 그의 임기내내 ''한국은 협정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선입견과 싸워야 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01년 2월.

클린턴 행정부가 퇴장하고 부시 행정부가 위싱턴에 입성했다.

USTR 대표로 임명된 죌릭은 인사청문회에서 한국 정부의 현대전자 회사채 인수가 불공정 무역행위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미국 관리와 언론은 한국의 구조조정 의지가 퇴색한 것 아니냐는 회의론을 내놓고 있다.

현대전자의 보조금 시비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한.미 양국간에는 자동차 지식재산권 철강 농산물 영화 등 통상 문제들이 잠복해 있다.

이제 갓 출범한 부시 행정부가 한국을 ''과거와 다름없는 투명하지 못한 정책으로 외국을 차별하는 나라''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한국 정부가 문제가 터질 때마다 ''사후 약방문''격으로 땜질이나 하는데 급급하지 않을까도 걱정이다.

미국의 호황이 끝나고 나스닥 지수가 추락하면서 그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다시 정치공세에 휩싸일 전망이다.

한국과 미국 양국간 무역거래량의 증대에 비추어 통상마찰은 피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마찰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마찰을 피하려고만 하다 보면 오히려 문제가 더욱 왜곡되고 확대될 수 있다.

국익을 추구하다보면 통상마찰이 생길 수도 있으며,마찰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문제는 과연 국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경제의 성장활력을 되찾기 위해 기술력과 품질로 세계시장에서 승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한다는 큰 목표에 공감대가 있다면,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경제외교의 청사진도 있어야 한다.

대통령 당선직후 국민과의 대화에 출연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확신에 찬 ''외국인투자 찬양론''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외환위기 직후 2년동안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투자는 그전 20년의 그것보다 더 많지만, 외국인 투자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은 여전히 싸늘하다.

''공기업 해외매각은 경제주권을 파는 매국행위''라는 대자보가 대학가를 뒤덮고,잠시 잠잠했던 외국기업에 의한 시장잠식론이 국내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외국인투자 확대방안의 하나로 추진되었던 한.미투자협정 체결 논의는 ''스크린쿼터제 사수''를 외치는 목소리에 실종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경제외교의 청사진도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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