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성공회대학의 신영복 교수가 감옥생활 중에 만났던 어느 노인 목수는 주춧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다음에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붕을 그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집을 실제로 지어 나갈 때의 순서였다는 것이다.
집짓기를 하면서 지붕부터 허공에 세워나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그림을 그릴 때가 되면 지붕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습관이기도 하고 맹점이기도 하다.
그림 그리기나 도상연습에 그치기만 한다면 이런 일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도 밑바탕이나 일의 원칙과 순서가 무시되는 관행이 쌓여 간다면 나중에는 집은 물론이고 나라까지 흔들리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뼈저린 경험을 통해 배웠다.
연초부터 각 언론사들이 "기본을 세우자" "기초를 다지자" 또는 "이제는 시스템개혁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기획특집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맹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작년말부터 경제가 어려워지고 정치와 나라 또한 어지러워지자 보다 근본적인 치유책을 찾기 위한 모색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정부, 특히 경제정책당국은 아직도 주춧돌보다 지붕에 집착해 경제를 그려가고 있는 듯하다.
정부가 최근에는 증시동향에 너무 매달려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으며 구상하고 있는 증시대책 내용에서도 그런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금리인하 조치와 연기금 주식투자확대 계획을 보면 증시부터 살려서 경제회복을 도모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정부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2년전, 즉 1999년 경제회복의 재현일 것이다.
외환위기로 초토화된 한국경제가 증시에서 불어온 훈풍에 기운을 차리게 됐다고 하는 달콤한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별다른 증시부양대책이 없이도 바이코리아 펀드 등에 힘입어 주식가격은 폭등했고 코너에 몰려 부채비율 삭감에 영일이 없던 기업들이 기사회생하는 실마리가 마련돼 경제는 10.7%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증시란 역시 경제의 지붕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밑바탕을 제대로 다지지 않고 지붕만을 넓고 크고 호화롭게 꾸미려고 하는 것은 도로(徒勞)에 그치고 말 우려가 있는 것이다.
경제의 기초가 되고 있는 기업이 경쟁력을 잃고 수익성이 악화돼 가고 있다면 증시를 살리려는 노력은 얼마 안가 물거품 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부로서는 직접 증시부양에 매달리기 보다 기업의 수익성 회복과 투자의욕 회생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 경제와 증시의 회복을 위한 바른 길이라 하겠다.
이런 근본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보더라도 정부가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25조원 규모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은 재검토되는 것이 옳다.
국민연금이 어떤 제도이고 그 돈은 또 어떤 돈인가?
국민의 노후생활을 보호해 준다는 거창한 명분아래 만들어 졌지만 정부는 돈 한푼 내놓지 않았고 가입자(주로 근로자)들과 기업이 낸 돈이 바탕이 돼 운용되고 쌓여온 돈이 아닌가?
지금 방식대로 간다 해도 2034년부터는 적자로 반전되고 2048년에 가면 완전히 바닥이 난다는 기금이다.
이 문제를 걱정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부가 우선 눈에 띄는 돈이라고 해서 주식에 투자하도록 밀어붙인다는 것은 경우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천만한 일이다.
국민들의 노후생활을 지원해 줄 돈이니 만큼 그 운용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돼야 할 점은 작년의 증시침체가 결코 자금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업만 되살아나고 금융구조조정만 제대로 된다면 증시를 빠져 나가 은행에 몰려있던 엄청난 규모의 자금은 언제든지 증시로 유턴하게 돼있는 것이다.
/본사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