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설이 남아 있다.

전주에서 26번 국도 따라 진안으로 들어서는 소태정고갯길 양편으로 또다시 얇게 덮인 눈이 보인다.

전북의 고원으로 불리며 오지중 오지로 꼽혔던 무진장(무주, 진안,장수)의 들머리여서 그런가.

꽤나 높은 고개를 넘는다는 생각이 든다.

고갯길을 내려서자 오른편 멀리 시커먼 산봉우리가 열심히 따라 붙는다.

외로 선 산봉우리는 조금씩 몸을 틀더니 딱 마주선다.

홀쭉하고 뚱뚱한 두개의 봉우리가 확연하다.

마이산(馬耳山)이다.

들은 대로라면 왼쪽이 수마이봉(667m), 오른쪽이 암마이봉(673m)임에 틀림없다.

크기나 높이로 치면 보잘것 없는 형세.

하지만 생김새가 특이하다.

두 봉우리 나란한 모습이 쫑긋 세운 말의 귀를 닮았다.

마이란 이름이 달리 붙은게 아니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동으로 달리는 천마/.../도중에 쓰러졌네/연인(내시)이 뼈만 사가고 그 귀만 남기니/변하여 두 봉우리 되어 반공중에 솟아 있네"란 싯구를 남겼고 훗날 태종이 이를 보고 마이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문필봉이다.

아직 잔설이 보이는 겨울의 끝자락이니까.

마이산은 철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겨울 "문필", 봄 "돛대", 여름 "용각", 그리고 "마이"는 가을의 이름이다.

한국 역도 사상 올림픽 첫 금메달리스트인 전병관의 고향인 마령면쪽의 30번 국도에 오른다.

불끈 솟은 수마이봉이 한참을 따라온다.

남문 매표소앞 바위덩이가 거대하다.

이성계가 고려말 왜구를 물리치고 올라오다 말을 묶었다는 주필대다.

마이란 이름을 낳게한 그의 시비도 있다.

단군을 비롯한 4성위 등이 봉안되어 있는 이산묘를 뒤로 하고 긴 벚나무길을 따른다.

금당사가 보인다.

중국인이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로 조상했다는 목불좌상, 통도사 관음보살괘불탱화, 무량사 미륵보살괘불탱화와 함께 괘불탱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괘불(보물 1226호)이 보전되어 있다.

지금도 괘불을 내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린다고 한다.

한국중세문학사상 유일한 부부시인이었다는 심락당 하립부부 시비를 지나 탑영지 위쪽으로 탑사가 자리하고 있다.

마이산을 더 유명하게 만든 사찰이다.

공들여 쌓은 돌탑들이 어울려 아름답다.

1885년 이갑룡 처사가 30여년동안 쌓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1백20기나 되었지만 지금은 80여기가 남아 있다.

막돌허튼식이란 조형양식으로 세워 강한 태풍에도 흔들리기만 할뿐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탑사의 탑도 그렇지만 손으로 만지며 보는 마이산의 겉모습이 신비롭다.

굵은 자갈로 반죽한 레미콘을 들이부어 만든 콘크리트더미 같다.

군데군데 자갈이 빠진듯 크고 작은 구멍이 벌집 같이 뚫려 있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마이산 자체가 수성암 덩어리라고 한다.

이곳은 원래 호수였는데 지각변동으로 바닥이 솟아오른 것이란 설명이다.

탑사 위쪽 은수사를 굽어보고 있는 수마이봉의 모습은 이목구비 뚜렷한 미륵불을 마주하는 것 같다.

은수사에는 이성계가 꿈속에서 왕조창업의 계시를 받았다는 몽금척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최고령의 청실배나무와 거꾸리고드름으로도 유명하다.

겨울철 사발에 물을 담아 은수사 주변에 두면 고드름이 치솟는 것.

고드름 크기가 한뼘이 넘는 것도 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지만 이 지역 공기흐름과 관계있을 것이란 추측이다.

운이 좋아야 절 주변의 사발에 언 거꾸리고드름을 볼 수 있다.

황혜수 스님이 내놓는 여러개의 거꾸리고드름은 아주 굵고 길다.

스님 나름대로 정리한 거꾸리고드름 생성원리와 함께 이성계와 마이산에 얽힌 얘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다.

진안=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