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시중은행은 미국 현지에서 대규모 투자단을 불러모아 기업설명(IR) 행사를 가졌다.

이때 투자자중 한명이 손을 들고 "당신 은행이 지향하는 타깃(목표)시장은 어디냐"고 물었다.

은행 임원이 ''소매시장''이라고 답하자 그는 "한국의 모든 은행이 소매는 물론 대기업 중소기업 금융을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어느 한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은행이 없지 않느냐는 비아냥 섞인 말이었다.

국내 은행은 ''BIS(국제결제은행)기준 자기자본 비율 10%를 맞추기에 급급한 도토리들''이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금융회사 퇴출을 포함한 지난 3년간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은행들은 몸집을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경쟁력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외국은행이 대형 슈퍼마켓이라면 국내은행은 구멍가게에 다름 아니다.

영국 금융전문지 ''더 뱅커''에 따르면 국내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5대 우량은행의 총자산순이익률(ROA·99년 기준)은 평균 0.47%로 미국의 주요 5대 은행(1.45%),영국의 주요 5대 은행(1.39%)의 30% 수준에 불과하다.

국내 은행들이 1백만원의 자산을 운용해 연간 4천7백원의 이익을 남기는 데 비해 선진국 은행들은 1만3천9백∼1만4천5백원을 남기는 셈이다.

외국계 은행의 한 임원은 "어느 은행이나 BIS 비율을 10%로 맞추고 똑같은 상품을 가지고 경쟁에 매달리는 실정"이라며 "모든 은행들이 집이나 땅을 담보로 한 대출에 집중하는 반면 약간의 기술이 가미되고 5년이나 10년으로 대출기간이 길어지면 두손을 들고 만다"고 꼬집었다.

국내 은행들의 ''우물안 개구리'' 신세는 국제금융 시장에서도 유명하다.

홍콩 금융가에 ''김치 딜(deal)''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벌써 수십년째다.

홍콩에 나와있는 한국 금융사들이 외국인들과 거래하기보다는 한국계 현지법인이나 교민 상대의 영업에 몰두하는 것을 빗댄 이 말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는 "금융기관 해외지사들의 업무가 선진기법을 배우고 현지 금융회사들과 경쟁해 돈을 벌기보다는 출장온 높은 분들을 영접하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 그치고 있다"고 들려줬다.

체이스맨해튼은행 관계자는 "국제금융을 하는 은행이라면 단순한 대출뿐 아니라 주식연계증권,해외채권 발행 등 다양한 옵션(선택권)을 저렴한 비용에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싼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국제적 네트워크와 높은 신용도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시중은행 가운데 국민 주택 신한은행만이 투자적격 중 최하위의 신용등급(S&P기준)을 유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투자부적격 등급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처럼 낮은 국제 경쟁력은 안방에서의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을 낳고 있다.

푸르덴셜생명이 종신보험을 국내에 들여와 판매에 나설 당시 저축성보험에만 주력하던 국내 생명보험사들은 ''계약자가 사망해야만 보험금이 나오는'' 종신보험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푸르덴셜과 ING 등 외국계 생보사들이 전문지식과 노트북으로 무장한 대졸 남성설계사를 앞세워 국내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자 뒤늦게 국내 대형 보험사들이 25%까지 종신보험 보험료를 깎아주면서 출혈경쟁에 나섰다.

푸르덴셜생명 관계자는 "종신보험은 고객과 평생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은 가격이 아니라 서비스"라며 "적정 이윤을 포기한 무모한 가격경쟁은 결국 보험사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푸념했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최근 "한국의 은행들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이유는 인력 문제에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향식 지시를 따르는 데는 익숙하지만 수익성을 올리는 데는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이지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계 은행에선 한 자리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근무하는 은행원들이 흔한 반면 국내 시중은행에선 3년만 한 곳에서 일해도 전문가로 행세한다"며 "국제금융대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사람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