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폰다(64)는 흔히 정열의 화신으로 불린다.

실제로 그는 20대엔 섹스심벌, 30대엔 반전주의자, 40대엔 몸매관리 사업가, 50대엔 환경론자, 60대엔 다시 여성운동가로 끝없이 변신했다.

''레이디 제인'' ''하노이 제인'' ''시민 제인''이라는 별칭은 바로 이런 생애를 대변한다.

변덕스럽고 제멋대로라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4년 마더 테레사, 마거릿 대처, 낸시 레이건에 이어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 4위에 꼽히고 99년 ABC방송이 선정한 ''20세기의 여성 1백인''에 뽑혔다.

유명한 배우 헨리 폰다의 딸로 태어난 그는 자식들에게 냉랭한 아버지와 신경쇠약으로 딸을 돌보지 않은 어머니 탓에 어렸을 때부터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한편 매사에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인물로 성장했다.

뉴욕의 엠마 윌러드 학교 재학중 굽높은 구두를 신고 진주장식을 달고 저녁식사에 참석해야 한다는 학칙에 반발, 진주목걸이와 하이힐외엔 아무 것도 안 걸치고 등장해 학교측을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는 일례에 불과할 정도다.

그러나 그는 마약과 거식증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발레연습을 거르지 않을 만큼 꾸준한 몸매관리와 연기공부를 한 결과 71년 ''클루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배우가 되겠다던 각오를 달성했다.

또 78년 프로덕션 IPC(인도차이나 평화캠페인)를 설립, 81년 ''황금연못''을 제작해 헨리 폰다에게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안겨줬다.

72년 월맹을 방문, 미국정부를 경악하게 했던 그는 베트남전이 끝나자 베벌리힐스에 건강체조 스튜디오를 열고 ''제인 폰다의 워크아웃''이라는 에어로빅 비디오를 만들어 80년대 내내 매년 3천5백만달러를 벌었다.

영화감독 바딤, 정치가 톰 헤이든, 미디어재벌 테드 터너와 세번 결혼한 끝에 혼자가 된 그가 최근 여성의 성 정체성과 교육의 상관관계 연구 기금으로 하버드대 사상 가장 많은 1천2백50만달러를 내놨다고 한다.

누구보다 강한 인생을 살아온 제인 폰다가 미국사회의 왜곡된 남녀 성의식을 개선하겠다며 거금을 내놓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