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의 토털패션업체 쌈지는 별난 상품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사람 혀 모양의 굽이 달린 구두,신라시대 왕관을 연상케하는 액세서리,물고기 한마리가 들어가 있는 듯한 가방...

라벨만 떼어내면 쉽게 구별되지 않는 타 브랜드와는 확실히 다르다.

제품의 실용적인 측면도 인정받고 있다.

수납이 편리하도록 안쪽에 숨은 주머니를 단 핸드백,지갑같은 다이어리 등은 쌈지의 전매특허 상품들이다.

이같은 제품들은 그 신선함만으로 패션계 안팎에서 "예술적 기운으로 가득 찬 실용상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쌈지가 이처럼 고유한 색깔을 갖게 된 배경에는 이 회사 천호균 사장(52)의 특별한 경영법이 숨어 있다.

대부분의 패션업체는 매 시즌 파리나 밀라노에서 제시하는 "세계적인 트렌드"를 쫓아가기 바쁘다.

결국 비슷비슷한 제품을 내놓게 되고 종종 유명 브랜드와 카피 논쟁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러나 천 사장은 쌈지의 디자인 모티브를 "아트(art)"에서 찾는다.

실험적인 미술가와 언더그라운드 가수를 후원하고 그들의 디자인을 자사 상품에 응용하거나 영감을 얻고 브랜드 이미지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천 사장이 패션업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졸업(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후 조다쉬 에스콰이아 등 의류회사에 가죽가방을 납품하는 무역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당시만해도 핸드백이라고 하면 딱딱한 가죽으로 만든 사각모양이 전부였다"고 천사장은 회상했다.

획일화된 디자인에서 벗어나 뭔가 다른 모양의 가방을 만들면 먹힐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때 생각해낸 것이 "거지백"이다.

사각틀을 생략한채 부드러운 가죽을 이리저리 꿰매 만든 이 가방은 일반 소비자뿐 아니라 디자이너의 눈에도 놀랍도록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84년 레더데코(쌈지의 옛 이름)를 창업하며 만든 이 작품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동시에 패션잡화 디자인에 새 바람을 몰고왔다.

천 사장은 거지백의 모티브가 바로 팝아트였음을 밝힌다.

"60년대 미국의 팝아티스트 올덴버그는 "조각은 왜 늘 딱딱해야 하느냐"며 "부드러운 조각(Soft Sculpture)"을 발표했지요. 부드러운 거지백은 바로 올덴버그의 발상을 가방 디자인에 응용해 만든 것이다"

천 사장의 아트마케팅에 대한 신념은 93년 토털 액세서리 브랜드 쌈지(주머니의 순 우리말)를 내놓으며 더욱 적극적으로 굳어진다.

쌈지 매장에서는 주력 상품인 핸드백 외에도 선글라스와 같은 액세서리,여성작가들의 판화 작품과 음악 CD 등을 함께 판매했다.

지금은 이처럼 탈장르,복합주의를 표방한 매장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구성이었다.

쌈지 매장은 곧 젊은이들에게 화제가 됐다.

특히 이곳에서 파는 패션 선글라스는 브랜드 전체 매출의 80%까지 차지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때만해도 선글라스는 안과병원이나 전문상가에서나 살 수 있는 제품이었다.

쌈지가 선글라스라는 기능성 제품에 패션이라는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이후에도 디자인 아이디어를 예술에서 빌려오고 다시 마케팅에 활용하는 천 사장의 행보는 계속된다.

신상품 품평회를 페인팅과 같은 퍼포먼스 형태로 꾸미는가 하면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작업실을 지원하는 아트 스튜디오를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또 화가의 작품 한끝에 쌈지 로고를 삽입해 자사 이미지로 활용한 아트 광고 시리즈를 선보였다.

언더그라운드 가수와의 교류도 활발하다.

황신혜 밴드,어어부,닥터코어 911 등의 앨범 발매를 지원하고 이들의 콘서트에 쌈지 고객을 초대한다.

천 사장은 시대와 유행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시대를 앞섰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작가들의 감각을 빌려 소비자 감각을 미리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 사장은 "남보다 한발 앞서 내놓은 특이한 아이디어 몇개가 위기 때마다 회사를 일으킨 사례를 볼 때 이 길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핸드백에 여행의 이미지를 결합한 트렁크백 시리즈,남자들도 가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만든 맨즈백,지갑을 다기능화해 만든 시스템 다이어리 등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17년동안 업계 1위자리를 지킬 수 있는 근간이 돼줬다.

늘 새로운 발상으로 주변을 놀래키는 천 사장이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은 사이버유통이다.

소문만큼 실제 판매율은 좋지 않다는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쌈지제품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사이버 판매 매출목표는 50억원."전체 매출예상액인 1천4백억원의 4%정도에 불과하지만 잡화품목의 유통다각화라는 측면을 보면 의미있는 숫자"라는게 천 사장의 의견이다.

수출 활성화도 올해 중요 계획중 하나다.

특히 작년에 진출한 일본시장에서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고 있다.

올해안에 5개 매장을 추가,7개로 늘릴 예정이다.

설현정 기자 sol@hankyung.com